[책마을] 슈퍼리치가 부럽지만 불편한 까닭
부(富)가 양지로 나선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처럼 부는 억제되고 감춰야 할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플라톤은 과도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자의 소유욕을 비난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부라는 단어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부터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조제프 프루동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까지 청빈과 무소유를 앞세운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젠 모두 흘러간 옛이야기긴 하지만….

[책마을] 슈퍼리치가 부럽지만 불편한 까닭
《과도한 부》는 ‘억만장자’로 불리는, 거대한 부를 쌓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현대사회의 극단적인 자산 불평등 문제를 철학적·경제적·사회학적으로 되짚어본 책이다. 거부들의 잇따른 등장과 자산 집중이 정의의 원칙을 훼손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저자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역사학자 이언 커쇼 등이 받았던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탄 오스트리아의 진보 경제학자다.

책이 다루는 대상은 초(超)거부들이다. 현대 세계는 ‘슈퍼리치’들의 춘추전국시대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세계엔 자산 10억달러(약 1조1440억원) 이상 억만장자가 2153명에 달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워런 버핏의 이름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존경과 명예를 부와 함께 얻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동시에 슈퍼리치의 존재는 부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큰 부를 일궜는지, 그들이 쌓은 부는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인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그렇다면 ‘과도한 부자’는 어떤 이들일까. 거부(巨富)는 눈에 띄는 존재지만, 그 객관적 실체와 특징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지국가 관료체계의 관리 대상인 까닭에 관련 데이터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부자는 굳이 개인정보를 노출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부자를 파악할 수도 없다. 공감 능력과 겸손, 자선, 박애주의로 무장한 초부자들은 공격과 분노의 대상이라기보단 숭배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동시에 부자들의 부를 위협할 수 있는 시기와 질투, 증오 같은 부정적 감정은 가난한 자들의 몫이 됐다.

그렇다면 초거부를 보통 사람과 구분하는 본질적 차이는 무엇일까. 흔히 부자 하면 떠올리는 화려한 삶, 과시적 소비는 지엽적 말단을 건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부자라고 검소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고급 차를 사고, 큰마음 먹고 값비싼 음식을 사 먹은 중산층을 부자라고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과도한 부자’를 정의하는 핵심은 막강한 잠재력을 지닌 거대한 규모의 자산이다. ‘얼마를 버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다. 범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규모의 자산을 바탕으로 슈퍼리치는 협상을 좌우하고 안전과 자유, 독립성 같은 감정을 만끽한다.

문제는 부의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노력만으로 부를 일궜다고 말하기 힘든 경우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상속 및 증여로 얻은 부는 개인의 능력과도 무관하고, 노력 없이 얻은 자산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안정성을 흔들 위험성까지 크다. 심화한 자산 불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반마저 흔들 수 있다.

그렇다면 부가 일부에 극도로 집중된 문제는 어떻게 해소해야 하나. 자산 불평등을 꼬집는 신랄한 지적에 비해 저자가 내놓는 해법은 소박하다는 인상이다. 저자는 교육은 효과를 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탓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개인의 재산 보유에 상한선을 두거나 상속 등에 높은 세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좌파식 해법도 실효성을 자신하지 못한다. 그저 편중된 부에 대한 올바른 논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부자들의 자산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확보할 것을 촉구할 뿐이다.

저자는 슈퍼리치라는 단어가 풍기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피하고자 ‘과도한 부’라는 뜻의 ‘위버라이히툼(berreichtum)’이라는 독일어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다만 부와 부자의 부정적 측면에만 편향되게 집중한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경제발전의 한 주역으로서 부자의 역할, 절대빈곤의 탈출 및 전체적인 사회 부의 증대 같은 부의 긍정적 측면이 절대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서 부를 수용하고, 부를 축적할 의욕을 인정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했다면 더욱 현실성 있는 부의 편중에 대한 해법이 나왔을 듯싶다. 부와 부자의 여러 측면을 고루 보지 못하는 모습이 시대착오적이고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