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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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신용평가 시장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무(無)의뢰 평가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회사채 신용평가 수수료를 부담하는 기업의 입김을 줄이고 신용평가사의 영향력을 키워 공정한 신용등급 평가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다.

다만 이같은 무의뢰 평가가 오히려 신용평가사들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하고, 평가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12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금융위는 신용평가업 관련 주요 제도 개선 검토 과제 중 하나로 무의뢰 평가 제도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무의뢰 평가 제도는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이나 제3자 등의 요청 없이도 신용평가사들이 금융투자상품이나 기업의 상환 능력을 평가하고 평가 결과를 투자자 등에게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허용하고 있는 제도다. 미국은 무의뢰 평가 제도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기업이 수수료를 내고 신용평가사에 평가를 요청하는 구조다. 신용평가사의 주요 수익원인 회사채 신용등급 평가 수수료를 기업이 부담하다 보니 신용평가사들이 기업들의 눈치를 보거나 기업들의 입김에 휘둘린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기업과 신용평가사 간 갑을 관계를 끊어야 공정하고 객관적인 신용등급 평가가 이뤄질 것이란 목소리를 냈다.
자료=금융위원회
자료=금융위원회
이를 두고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일각에선 무의뢰 평가 제도 도입을 통해 기업이 신용등급을 후하게 주는 신용평가사를 골라서 평가를 의뢰하는 '등급 쇼핑' 등의 부작용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란 낙관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지고 또 다른 부작용만 양산할 것이란 시각도 만만치 않다. 무의뢰 평가를 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선 제대로 된 내부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없다. 현재는 기업들이 신용평가사들에 공개된 재무 데이터 뿐만 아니라 기업의 내부적인 재무 전략이나 자금 조달 계획, 공시 의무가 없는 구체적인 재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업·재무 상태 진단과 전망이 가능하다. 무의뢰 평가에선 정보 부족으로 깊이 있는 평가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무의뢰 평가가 또 다른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증권사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신용등급을 부여해 기업의 자발적인 평가 의뢰를 조장하거나 높은 신용등급을 매겨 유인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전체 인가를 받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3개사와 부분 인가를 받은 서울신용평가가 구성하고 있다. 서울신용평가는 회사채를 제외한 기업어음, 전자단기사채, 유동화증권에 대해서만 신용평가를 할 수 있다.

서울신용평가를 뺀 주요 3개사는 연 매출 1400억원 규모 시장을 약 3분의 1씩 균분하고 있다. 회사채 발행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신용평가사들의 매출·수익도 증가하는 추세다. 신용평가사의 주된 수익 기반인 회사채 발행은 지난해 기준으로 387조원에 이른다. 기업이 공개모집으로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두 곳 이상의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아야 한다.

한편 금융당국은 당초 추진을 고려했던 시장 진입 확대 방안은 후순위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제도 개선을 통해 신용평가사 간 경쟁을 촉진시키는 게 시장 발전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금융당국은 신용평가 사업자 신규 인허가를 통해 신용평가업의 경쟁도를 높이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다양한 시장 참여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급격한 시장 진입 확대는 신용평가 품질 개선보다 오히려 '등급 쇼핑'이나 '등급 인플레' 등 부작용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 공감했다.

박재훈 금융위 공정시장과장은 "최근 신용평가사 간 경쟁 강도가 높아지면서 기업의 평가사 교체가 증가하고 수수료도 하락하는 모습"이라며 "신용평가사가 동일한 기업에 부여하는 신용등급이 다른 비율도 소폭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오랜 기간 3개사의 시장 집중도가 높아 제도 개선을 통한 경쟁 촉진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며 "시장 규율 강화와 신용평가 품질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가 제도 개선은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