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로 빚어낸 환상의 세계…98세 거장의 숨결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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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시로 세이지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전
전후 잡동사니로 '그림자 회화' 개척해 큰 인기
동화·인형극·성서화 등 다양한 장르에 족적
예술의전당서 10월 12일까지 160여 점 전시
전후 잡동사니로 '그림자 회화' 개척해 큰 인기
동화·인형극·성서화 등 다양한 장르에 족적
예술의전당서 10월 12일까지 160여 점 전시
한밤중 숲속 호숫가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에 불이 켜진다.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목마들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어디선가 나타난 난쟁이들이 나무 위에서 악기를 연주한다. 관람차와 날아다니는 풍선들이 발하는 색색의 빛은 수많은 나뭇잎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 광경 위 현수교에 한 소녀가 서 있다. 한 손으로는 개구리 캐릭터의 손을, 다른 손에는 빨간 풍선을 잡고 수면에 비친 놀이동산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얼굴엔 놀라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뒤섞여 있다. 마음을 울리는 동화 같은 작품에 경탄하며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은 관객들의 얼굴도 어느새 같은 표정이 된다. 어쩌면 노(老)작가는 이 소녀에게 지난 80여 년간의 화업을 반추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가게에(影繪·그림자 회화)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98·사진)의 작품 ‘목마의 꿈’ 얘기다.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후지시로의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 전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대학 신입생이던 19세 때 그린 유화 ‘마가레트와 누나’(1942)부터 한국 전시를 위해 지난해 완성한 가게에 작품 ‘잠자는 숲’(2020)까지 장장 80년에 걸쳐 만든 작품 160여 점을 펼쳐놓은 전시다.
후지시로가 창시한 가게에는 면도칼 등으로 오려낸 종이와 컬러필름에 빛을 투사해 빛과 그림자로 이미지를 표현한다.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특징이지만 얄궂게도 이 장르가 탄생한 계기는 전쟁이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물감 등 기본적인 회화 재료조차 구하기 어려워지자 후지시로가 들판에 굴러다니는 골판지와 철사, 전구 등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전시장은 여러 작품이 뿜어내는 다양한 색의 빛이 어우러져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유럽의 대성당을 방불케 한다. 목마의 꿈을 비롯한 동화 같은 이미지의 작품들과 그 빛이 거울과 수조 등에 반사되도록 해 여운을 극대화한 연출이 눈에 띈다. 11년에 걸쳐 그린 성서 가게에 그림책 ‘천지창조’ 등 성서 그림 대작 20여 점은 압도적인 완성도로 감탄을 자아낸다.
예리한 선과 심플하고 세련된 캐릭터 디자인이 돋보이는 흑백 가게에 작품들이 주는 인상도 강렬하다. 1953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하늘을 나는 난쟁이’ 연작을 비롯해 잡지 등에 연재한 ‘서유기’ ‘목단기’ 등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개구리를 소재로 한 인형극 ‘케로용’, 가게에 작품을 응용한 그림자극 ‘눈의 여왕’ ‘은하철도의 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그가 20세기 일본 미술과 대중문화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005년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개관 기념전에 이은 국내 두 번째 후지시로의 전시다. 당초 지난해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1년 연기됐다. 가게에 특성상 조명을 비롯한 설치 작업이 복잡해 후지시로는 개막 두 달 전부터 일본에서 설치 스태프를 보내 전시 준비 상황을 철저히 점검했다고 한다.
관객들의 반응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뜨겁다. 전시를 기획한 강혜숙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대표는 “매주 화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36개월 미만 아이와 유모차가 입장할 수 있는 ‘베이비데이’ 행사가 열리는데, 어린 아기들까지 작품에 몰입해 조용히 관람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후지시로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매일 하루 7시간 이상 신작을 만들고 예전 작품을 점검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가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제가 만든 빛과 그림자가 여러분의 마음에 평온을 주고 희망과 삶의 기쁨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만납시다.”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거장의 인사다. 전시는 오는 10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 광경 위 현수교에 한 소녀가 서 있다. 한 손으로는 개구리 캐릭터의 손을, 다른 손에는 빨간 풍선을 잡고 수면에 비친 놀이동산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얼굴엔 놀라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뒤섞여 있다. 마음을 울리는 동화 같은 작품에 경탄하며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은 관객들의 얼굴도 어느새 같은 표정이 된다. 어쩌면 노(老)작가는 이 소녀에게 지난 80여 년간의 화업을 반추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가게에(影繪·그림자 회화)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98·사진)의 작품 ‘목마의 꿈’ 얘기다.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후지시로의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의 판타지’ 전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대학 신입생이던 19세 때 그린 유화 ‘마가레트와 누나’(1942)부터 한국 전시를 위해 지난해 완성한 가게에 작품 ‘잠자는 숲’(2020)까지 장장 80년에 걸쳐 만든 작품 160여 점을 펼쳐놓은 전시다.
후지시로가 창시한 가게에는 면도칼 등으로 오려낸 종이와 컬러필름에 빛을 투사해 빛과 그림자로 이미지를 표현한다.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특징이지만 얄궂게도 이 장르가 탄생한 계기는 전쟁이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물감 등 기본적인 회화 재료조차 구하기 어려워지자 후지시로가 들판에 굴러다니는 골판지와 철사, 전구 등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전시장은 여러 작품이 뿜어내는 다양한 색의 빛이 어우러져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유럽의 대성당을 방불케 한다. 목마의 꿈을 비롯한 동화 같은 이미지의 작품들과 그 빛이 거울과 수조 등에 반사되도록 해 여운을 극대화한 연출이 눈에 띈다. 11년에 걸쳐 그린 성서 가게에 그림책 ‘천지창조’ 등 성서 그림 대작 20여 점은 압도적인 완성도로 감탄을 자아낸다.
예리한 선과 심플하고 세련된 캐릭터 디자인이 돋보이는 흑백 가게에 작품들이 주는 인상도 강렬하다. 1953년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하늘을 나는 난쟁이’ 연작을 비롯해 잡지 등에 연재한 ‘서유기’ ‘목단기’ 등을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개구리를 소재로 한 인형극 ‘케로용’, 가게에 작품을 응용한 그림자극 ‘눈의 여왕’ ‘은하철도의 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그가 20세기 일본 미술과 대중문화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005년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개관 기념전에 이은 국내 두 번째 후지시로의 전시다. 당초 지난해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1년 연기됐다. 가게에 특성상 조명을 비롯한 설치 작업이 복잡해 후지시로는 개막 두 달 전부터 일본에서 설치 스태프를 보내 전시 준비 상황을 철저히 점검했다고 한다.
관객들의 반응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뜨겁다. 전시를 기획한 강혜숙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대표는 “매주 화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36개월 미만 아이와 유모차가 입장할 수 있는 ‘베이비데이’ 행사가 열리는데, 어린 아기들까지 작품에 몰입해 조용히 관람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후지시로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매일 하루 7시간 이상 신작을 만들고 예전 작품을 점검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가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제가 만든 빛과 그림자가 여러분의 마음에 평온을 주고 희망과 삶의 기쁨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만납시다.”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거장의 인사다. 전시는 오는 10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