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신라와 일본의 계속된 갈등
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당나라의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들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일본의 신라정토론
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신라는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감정적으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초기부터 갈등관계가 있었지만, 결국 8세기 중반 무렵에는 국교가 단절됐다.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도 고조됐다. 일본은 소위 ‘신라정토론’으로 알려진 정책을 추진했다. 내부적으로는 신라를 적으로 삼아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실세인 친백제계 후지와라(등원) 일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 뿐 아니라 실제로 신라를 공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759년 9월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배 500척을 3년 안에 건조하도록 할당을 했다. 760년 4월에는 귀화한 신라인 131인을 동경 근처인 무사시노국(武藏國)으로 옮겼고, 다음해에는 여러 지역에서 소년들을 선발한 다음에 신라어를 배우게 했다. 이어 선박 394척, 병사 4만7백명, 자제(子弟) 202명, 수군(水夫) 1만 7360명을 동원해 배치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대규모의 해양전을 계획하고, 해양산업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추진자였던 친백제계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살해되면서 무산됐다.하지만 이후에도 두 나라는 국가의 우위와 자존심을 놓고 소위 ‘국서논쟁’을 비롯한 정치적인 갈등이 계속됐다. 신라 사신단은 738년부터 774년까지 7회나 입국을 거절당했고, 803년에 교류가 재개됐지만 809년에 다시 단절됐다.
신라 해적의 일본열도 공격과 약탈
일본이 계속 신라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라해적들이 발호하고, 약탈을 벌였기 때문이었다.신라 헌덕왕 3년인 811년 12월에 신라배 20여 척이 대마도 서쪽바다에서 서로 간에 횃불로 신호를 주고 받다 일부는 사살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일본 정치사에 신라의 해적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례다. 2년 후에는 큐슈의 서쪽에서 동중국해로 빠져나가는 고또(五島)열도의 지카노시마(佐賀島)에 신라 해적들이 나타난 기록도 있다. 5척의 배에 110명이 타고 나타나 섬사람들과 전투를 벌였다. 866년에는 일본정부가 신라가 침입을 할까봐 매우 두려워했고, 큐슈의 주민이 신라로 가서 병기 만드는 기술을 배운 후에 공동으로 대마도를 점령하려한다는 보고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869년 5월에는 신라 해적선 2척이 야음을 틈타 일본의 서쪽 수도인 ‘하까다(후꾸오까시)’를 습격해 국가의 공물선을 공격해 비단과 면제품들을 약탈했다. 충격을 받은 일본국은 큐슈 지역은 물론이고, 혼슈의 야마구치현, 시마네현, 돗토리현의 지방 정부에 방어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후 상황이 더욱 심해지자 870년에는 중앙정부가 큐슈지역과 대마도 이끼섬 지역에 방어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신라해적들은 893년에는 큐슈 북부지역을, 894년에는 대마도를 봄과 가을에 걸쳐 두 번이나 습격했다.(최재석,《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
9세기는 신라 해적들이 바다를 점령하며 일본뿐 만 아니라 신라와 당나라, 이슬람상인들의 무역활동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일본에게 신라는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필수적인 존재였다. 상인들의 거래를 허용하며 갈수록 양국간 무역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해양사와 무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장보고와 그가 구축한 범신라인 상인 공동체가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