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은행에 이어 우리·SC제일은행 등 주요 은행이 줄줄이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하면서 대출 수요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20일 서울의 한 우리은행 지점에서 직장인이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허문찬 기자
농협은행에 이어 우리·SC제일은행 등 주요 은행이 줄줄이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하면서 대출 수요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20일 서울의 한 우리은행 지점에서 직장인이 대출 상담을 받고 있다. /허문찬 기자
“정부의 은행 대출 총량 규제는 가계부채 대책으로 잘 포장된 부동산 대책이다.”(홍춘욱 EAR리서치 대표)

금융당국이 최근 대대적인 가계대출 총량 규제에 나서고 있는 데 대해 결과적으로 실수요자의 고통만 키울 뿐, 기대한 정책 효과가 달성되기 어려울 것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나 전·월세 가격이 먼저 안정되지 않는 한 대출 수요 자체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지 않은 탓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아무리 인위적으로 은행 문턱을 높인다 한들 실수요에 기반한 대출 수요를 모두 막기란 불가능한 만큼 지금이라도 정책 방향을 재건축 규제 완화나 양도세 한시 인하 등 주택 공급을 늘리고 집값을 안정화시키는 쪽으로 유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집값 상승이 가계대출 증가 주범

20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금융권 가계대출 잔액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연 10.0%로 전달(연 9.7%)보다 0.3%포인트 상승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올 하반기 가계대출 상승폭을 3~4%대로 억제해 연간으로 5~6% 수준으로 맞추겠다고 강조해왔지만 이 같은 계획이 첫달부터 어그러지고 만 셈이다.
"집·전셋값 올린 게 누군데"…실수요자들 울리는 '대출 셧다운'
심지어 금융위가 지난 4월 발표한 가계부채 관리방안의 핵심인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가 7월부터 시행됐지만 대출 증가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DSR은 대출 원리금 상환액을 연소득으로 나눈 비율을 말한다. 즉 개인이 보유한 모든 금융권 대출의 원리금 상환액을 연소득의 40% 이내로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이 수치에 맞춰 대출 한도가 결정되다 보니 원하는 만큼 대출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만 정부는 이 같은 규제를 도입하면서 실수요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전세자금대출, 예적금담보대출, 보험계약대출, 이주비·중도금 집단대출 등도 예외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문제는 지난달 가계대출 증가세가 대부분 이 같은 예외적인 부문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에 따르면 금융권 주택담보대출은 지난달 7조5000억원 늘어나 전달(6조4000억원) 대비 증가폭이 확대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주택 신규 매매에 따른 주담대는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줄고 있지만 전세대출과 집단대출이 큰 폭으로 늘고 있어 가계대출 증가세가 잡히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집값과 전·월세 가격의 고공행진이 대출 증가세의 핵심 요인이라는 평가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종합 주택매매가격은 0.60% 올라 전월(0.49%)보다 상승폭이 확대됐다. 전세가격 상승률도 0.49%로 전달(0.36%)보다 더 뛰었다. 투기적인 대출수요가 없더라도 집값 상승에 비례해 대출 총량이 가파르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금융권 관계자는 “예전에는 1인당 2억원이면 충분했던 전세자금대출이 지금은 최소 4억~5억원은 돼야 같은 위치, 같은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며 “매매가 아닌 전세를 들어가는 데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는)’ 대출이 필요한데 총량 규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금융규제로 집값 잡겠다는 생각 버려야”

전문가들도 정부의 현 가계부채 정책 기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홍춘욱 대표는 “정부가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하기 시작한 게 이미 10년 가까이 됐다”며 “지난해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71.5%(1분기 기준)까지 치솟긴 했지만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44.7%로 전년 동기보다 오히려 2.9%포인트 감소했다”고 말했다.

강영훈 부동산스터디 대표도 “대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서 당장 살 곳이 필요한 실수요자가 자금 마련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며 “금융당국의 총량 규제는 이 같은 실수요자의 금리 부담만 높이는 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이어 “정부가 되지도 않는 금융 규제를 통해 집값을 조절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부동산 시장에 매물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공급 대책으로 주택 가격부터 안정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