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기 칼럼] 거기 사람은 원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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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
다 그렇진 않아
다 그렇진 않아
같은 한국 땅에서 나는 감자나 고구마도 지역에 따라 맛이 다르다. 고랭지 배추가 벌판의 배추보다 맛있고, 같은 사과라도 지역에 따라 당도가 다르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해가 간다.
지역마다 바람이 다르고, 물도 맛과 성분이 다르다. 생수를 사서 마시는데, 맛이 모두 다르다. 의심도 해 봤지만, 이해가 간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물맛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구름 흘러가는 속도나 모양이 다른 이유는 바람의 흐름이 다르고, 산의 높이와 지형이 다르기 때문이며, 숲 속의 나무가 자라는 속도나 굵기가 다른 것도 땅 속에 있는 영양분의 분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풍토와 태백산의 흙이 같을 수 없으며, 포천의 냉수와 계룡산의 시냇물 맛이 같을 수 없다.
이렇게 세상만물이 서로 다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로 “물과 흙, 불과 바람”이라고 설명하면서, 여기에 한 가지 더, “기(氣, ether)”가 있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꿈에 나타난다거나, 밭을 갈던 아버님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 자식의 안부를 묻는 이유는 멀리 있어, 보이지 않아도 느낌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끼리 같은 시간에, 동시에 문자를 주고받으며 깔깔 웃기도 하고, 보내는 시간에 맞춰 똑딱거리는 친구의 카톡을 보면서 신기한 듯, 반가울 때가 있다.
그러하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의 물과 바람, 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저곳에 사는 사람들도 저 곳의 바람과 흙, 물과 불의 기운을 받았다고 보면, 어찌 한국사람이라고 모두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그곳 저곳 사람들의 인성이나 품성이 쉽게 바뀔 리가 없을 것이고, 오랜 전통과 역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리라 믿는다.
그건 좋고 나쁨의 문제나 선택의 과제가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 그게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학교교육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이 맞물리고 어울려서 “전인교육(Whole-Person Education)” 이 되는 것이다.
교육(education)은 “가르치는 것(teaching)”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과 정신 속에 들어 있는 열정과 욕망을 이끌어 내는 것(Educo / 라틴어, 파생영어 educe: 이끌어 내다)”이다.
에마뉴엘 칸트가 말한 것처럼, “저 하늘의 빛나는 별과 마음의 도덕 법칙이 경외롭지 아니한가? 예술의 아름다움, 종교의 경건함, 수학의 경이로움, 이웃들의 존재와 포도주 한 잔의 가치를 과학적 가치와 더불어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세상의 모든 철학”, 로버트 솔로몬 著)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우리는 올바른 공부를 하고 제대로 가르쳐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수준 높은 품격을 지닌 “교양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는 기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와 언론, 교육계 등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들을 접하면서 또한, 특성화고 학생들 강의를 하면서 “인간교육의 중요성”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석기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지역마다 바람이 다르고, 물도 맛과 성분이 다르다. 생수를 사서 마시는데, 맛이 모두 다르다. 의심도 해 봤지만, 이해가 간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물맛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구름 흘러가는 속도나 모양이 다른 이유는 바람의 흐름이 다르고, 산의 높이와 지형이 다르기 때문이며, 숲 속의 나무가 자라는 속도나 굵기가 다른 것도 땅 속에 있는 영양분의 분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풍토와 태백산의 흙이 같을 수 없으며, 포천의 냉수와 계룡산의 시냇물 맛이 같을 수 없다.
이렇게 세상만물이 서로 다르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로 “물과 흙, 불과 바람”이라고 설명하면서, 여기에 한 가지 더, “기(氣, ether)”가 있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꿈에 나타난다거나, 밭을 갈던 아버님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 자식의 안부를 묻는 이유는 멀리 있어, 보이지 않아도 느낌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끼리 같은 시간에, 동시에 문자를 주고받으며 깔깔 웃기도 하고, 보내는 시간에 맞춰 똑딱거리는 친구의 카톡을 보면서 신기한 듯, 반가울 때가 있다.
그러하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의 물과 바람, 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저곳에 사는 사람들도 저 곳의 바람과 흙, 물과 불의 기운을 받았다고 보면, 어찌 한국사람이라고 모두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니 그곳 저곳 사람들의 인성이나 품성이 쉽게 바뀔 리가 없을 것이고, 오랜 전통과 역사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리라 믿는다.
그건 좋고 나쁨의 문제나 선택의 과제가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 그게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학교교육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이 맞물리고 어울려서 “전인교육(Whole-Person Education)” 이 되는 것이다.
교육(education)은 “가르치는 것(teaching)”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과 정신 속에 들어 있는 열정과 욕망을 이끌어 내는 것(Educo / 라틴어, 파생영어 educe: 이끌어 내다)”이다.
에마뉴엘 칸트가 말한 것처럼, “저 하늘의 빛나는 별과 마음의 도덕 법칙이 경외롭지 아니한가? 예술의 아름다움, 종교의 경건함, 수학의 경이로움, 이웃들의 존재와 포도주 한 잔의 가치를 과학적 가치와 더불어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세상의 모든 철학”, 로버트 솔로몬 著)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우리는 올바른 공부를 하고 제대로 가르쳐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는 것이다.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수준 높은 품격을 지닌 “교양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기는 기대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와 언론, 교육계 등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들을 접하면서 또한, 특성화고 학생들 강의를 하면서 “인간교육의 중요성”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석기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