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알맹이 없는 말잔치에 실망했다.”

어떤 연설을 들은 다음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정부나 기업에서 어떤 정책이나 방침을 발표할 때도 이런 말이 자주 들린다. 개인 간의 소통에서도 대화에 알맹이가 없으면 막막할 뿐이다.

지리멸렬, 애매모호,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표현도 있다. 오죽했으면 겉은 화려해보여도 알맹이 없이 부실하다는 화이부실(華而不實)이란 사자성어가 있었을까 싶다.

스웨덴 맥도날드의 광고 ‘사원모집’ 편(2008)에서는 직원을 뽑을 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따지지 않고 개인의 포부와 결심을 보고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헤드라인은 이렇다. “우리는 투르크족, 그리스인, 폴란드인, 인도인, 에티오피아인, 베트남인, 중국인, 또는 페루인을 고용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인종 차별 발언을 대놓고 하고 있다니. 설마 하는 마음에서 살펴보니 지면의 한참 아래쪽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보디카피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스웨덴인, 한국인, 노르웨이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을 고용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무슨 성씨인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포부와 결심은 당신의 국적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스웨덴에서 가장 평등한 회사의 하나인 맥도날드에는 95개국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맥도날드 스웨덴과 함께하세요.”

보디카피의 서체 크기는 헤드라인의 1/4 정도라,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광고회사 DDB의 스웨덴 지사의 창작자들은 메시지의 극적인 반전 효과를 노리기 위해, 아마도 이런 식으로 광고를 만들었을 터.

무슨 말인지 호기심을 유발해 주목을 끈 다음에 반전의 메시지로 설득하는 고전적 수법이다. 그런데 광고 창작자들은 헤드라인만 읽고 보디카피는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광고 메시지를 대하는 소비자의 태도를 경시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핵심어를 전혀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종차별 없는 채용’이라는 핵심어를 부각시키지 않고, 메시지의 반전 효과를 노리기 위해 핵심어를 아주 작은 서체로 써서 숨겨버렸다.

시간이 없어 헤드라인만 읽은 사람들은 맥도날드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헤드라인에 언급된 나라의 국민들은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헤드라인의 마지막에 언급된 페루인에 이어 미국인을 추가했더라면 어땠을까? 차별받을 가능성이 높은 국민들을 나열하다가, 차별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을 미국인을 마지막에 포함했더라면 오히려 반전의 묘미가 있었을 것이다.
스웨덴 맥도날드의 광고 ‘사원모집’ 편 (2008)
스웨덴 맥도날드의 광고 ‘사원모집’ 편 (2008)
핵심어를 잘 나타낸 사례로 유방암캐어의 광고 ‘사랑하는 몸에게’ 편(2013)을 보자.

유방암캐어(Breast Cancer Care)는 유방암에 걸린 사람이나 유방암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치료 서비스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72년에 영국 런던에 설립한 전문 자선 단체다.

광고에서는 흑인 여성의 등에 하얀 색으로 카피를 섰다. 스웨덴 맥도날드 광고와는 달리 핵심어를 부각시켰다. 유방암에 걸린 여성이 자신의 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사랑하는 몸에게. 너와 함께 늘 행복하지만은 않았어. 나는 더 긴 다리, 들어간 배, 얇은 팔을 원했지. 하지만 최근에 너와 나는 많은 일을 겪었어. 우리는 오른쪽 가슴을 잃고 머리카락도 빠져버렸지. 하지만 우리는 암을 극복했어. 그리고 이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구나. 완벽하지는 않아도 불완전하게 아름답게. 너는 내 몸이야. 그리고 난 네가 자랑스러워.”

광고에서는 환자(정신)가 자신의 몸(육체)에게 ‘너’로 호칭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하나가 아닌 상호작용하는 다른 두 실체라고 주장했던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그대로 반영된 광고 카피다.

각자의 경험이 다를 수 있지만 유방암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가 내 몸에게 보내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유방암 검진 이후부터는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처럼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광고의 키워드는 ‘자랑스러운 내 몸’이다. 벗은 여성의 등에 ‘내 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과감히 써내려간 광고의 목적은 유방암 환자들이 자신감을 되찾도록 돕는 데 있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자기 몸을 더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자는 핵심어를 확실히 돋보이게 표현했다. 유방 절제에 따른 자신감의 부족은 치료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심리적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이 광고에서는 스웨덴 맥도날드 광고와는 달리 핵심어를 부각시켜 더 높은 광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유방암캐어의 광고 ‘사랑하는 몸에게’ 편 (2013)
유방암캐어의 광고 ‘사랑하는 몸에게’ 편 (2013)
두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핵심어(Keyword)이다. 핵심어란 말이나 글에서 전하려는 내용을 짧게 간추린 단어나 문구를 뜻한다.

열쇠 말 혹은 열쇠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핵심어가 그토록 중요하니까 키워드 검색이나 키워드 광고라는 말도 나오는 법이다.

알맹이는 양인데 가죽은 호랑이라는 양질호피(羊質虎皮)란 사자성어도 있다. 겉은 좋아보여도 실속은 없다는 뜻이니, 여기에서도 핵심을 강조했다.

학술 논문을 발표할 때도 반드시 핵심어를 포함시켜야 한다. 핵심어만 대충 살펴봐도 논문의 주제를 대강 파악할 수 있다.

뉴스 보도에서도 어떤 사건 사고의 내용을 핵심어로 요약하면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정치인의 연설에서 아무리 그럴싸한 단어들을 나열해도 내용을 한 마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없다면, 그 연설은 실패한 것이나 진배없다. 일반인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글이나 연설에서는 핵심어가 특히 더 중요하다. 경영자들은 자신의 지향점이나 경영철학을 한 마디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열정과 혁신을 강조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해봤어?”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나타냈다.

그는 안 된다는 사람들 앞에서 “해봤어?”라고 반문하며 결국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빛 좋은 개살구에는 알맹이가 없다. 경영자의 말이나 글에 핵심어가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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