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대한민국이 '선진국' 됐다지만…
여름 끝자락에 서울 주재 외교관들의 모임에 초대받았다. 저녁 식사를 겸한 자리였다.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참석자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이 직업의 주요 특성인 그들은 그 기본권이 박탈당한 작년 여름만 해도 금년 여름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금년 여름도 작년 여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자국의 코로나 방역정책으로 대화가 옮겨졌다. 한 외교관이 아픈 곳을 찔렀다. 작년에 K방역으로 코로나 대처 선진 사례였던 한국이 왜 백신 확보에 부진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진작 백신을 확보해 적극적인 접종을 실시한 나라는 봉쇄를 풀고 ‘위드 코로나(코로나와 공존)’ 세상으로 나아갔다. 백신 공급으로 코로나로 인한 치사율은 확연히 떨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감염자 숫자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올인하고 있는 K방역에 대해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제 공식적으로 선진국이 된 거 아닌가?” 누군가 툭 던졌다.

그렇다. 7월 초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기존의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지위 변경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룹 B에는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만이 1964년 UNCTAD 설립 때 이름을 올린 후 지금까지 요지부동이었다. 그 오랜 역사가 깨진 셈이다.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겪은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진국’ 그룹에 합류한 것이다. 사실 한국이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G20 정상회의의 회원국에 이름을 올릴 때 이미 세계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세계 6위권 무역대국,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 국민소득 3만달러, 제조업 강국 등 한국의 경제적 위상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UNCTAD 결정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개도국일 땐, 선진국에만 진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선진국이 되고 보니 문제는 여전하고 새로운 문제는 터져 나온다. 불평등, 불공정, 부동산, 원자력 등 한국 사회를 양분하는 답답한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쾌도난마의 묘수는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를 대하는 태도다. 공동체 현안이니만큼 공동체적 접근이 필요하건만, 자신의 몫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남의 몫도 키우고 내 몫도 키우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공동체로서의 품격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궤도이탈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이르렀을까?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에게 ‘공동체’ 가치를 가르치는 데 실패했다. 집만 나가면 마주치게 되는 나와는 다른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에서의 조화와 예절보다는, 남에게 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자리잡았다.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말라” 대신 “어디 가서 맞고 오지 마”라는 주문이 당연지사가 된 지 오래다. 친구 집에 놀러간 아이가 친구 부모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깨뜨린 경우, “죄송하다”는 사과가 먼저 나오지 않고, “물어주면 될 것 아니냐”는 어처구니없는 당당함이 판을 친다. “돈 몇 푼에 우리 아이 기죽일 수 없다”는 그 부모는 과연 아이에게 어떤 가치를 가르칠까.

학교 과정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갈 때까지 스스로 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하는 역량과 자세는 무관심 속에 방치된다. 학점이 나쁘면 그건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의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부모가 교수에게 항의하는 게 귀찮아서 타협한 결과는 대학 학점 인플레다. 고학점 학생은 넘쳐나는데, 상식과 지혜는 갈수록 부족하다. 직장에서의 갈등을 직장 상사와 함께 풀려 하지 않고, 부모가 애꿎은 직장 상사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사례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부자 되는 것에 목맨 사회. 그러다 보니 자라는 세대에게 공동체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회.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그 여름날 모임의 외교관들은 “대한민국, 역동적인 나라!”라고 추켜세웠다. 직설화법을 피하는 외교관답게 에둘러 표현했지만, 감성에 쏠리는 합리성이 부족한 사회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선진국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