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프리카 원시림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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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아프리카 빈민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전쟁의 참상 속에서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아프리카 빈민을 위한 봉사를 멈추지 않은 ‘원시림의 성자’로 잘 알려져 있다.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인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신학자·목사였던 그는 30세가 되던 무렵 민간 봉사활동을 위해 7년간 의학박사 과정을 밟고 의사가 됐다. 1913년 부인과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의 랑바레네로 건너가 아프리카 빈민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인 그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고향으로 송환됐다. 이때 어머니가 프랑스군 군마에 깔려 죽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자유로운 봉사활동을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고 1924년 랑바레네로 돌아갔다.
1954년 슈바이처는 인류애를 실천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가봉 정부는 슈바이처에게 감사를 담아 적도성십자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1965년 9월 4일 그가 평생을 바쳐온 랑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인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신학자·목사였던 그는 30세가 되던 무렵 민간 봉사활동을 위해 7년간 의학박사 과정을 밟고 의사가 됐다. 1913년 부인과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의 랑바레네로 건너가 아프리카 빈민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인 그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고향으로 송환됐다. 이때 어머니가 프랑스군 군마에 깔려 죽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자유로운 봉사활동을 위해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고 1924년 랑바레네로 돌아갔다.
1954년 슈바이처는 인류애를 실천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가봉 정부는 슈바이처에게 감사를 담아 적도성십자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1965년 9월 4일 그가 평생을 바쳐온 랑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