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를 열어젖힌 최강의 집념, 드보르자크[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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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 힘찬 선율에 몸과 마음이 들썩입니다. 어디선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그 문을 향해 성큼성큼 행진을 시작한 기분도 듭니다.
작품 제목부터 'From the New World', 즉 '신세계로부터'입니다. 영화 '죠스' '암살' 등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죠.
이 곡은 체코 출신의 음악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의 교향곡 9번입니다. 동유럽 음악에 흑인 음악과 인디언 음악이 더해져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드보르자크는 이 작품으로 음악의 신세계를 열었습니다. 그의 삶 자체도 그랬습니다. 최강의 집념과 끈기로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죠. 드보르자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어젖힌 신세계를 향해 함께 떠나보실까요.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인근 넬라오제베스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장남들은 대부분은 가업을 이어야 했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여인숙과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그가 자신의 일을 이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5살 때부터 작은 현악기인 치터를 여인숙 손님들 앞에서 즐겁게 연주하기도 했죠.
드보르자크는 결국 음악가가 될 운명이었던 걸까요.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잇는 데 도움이 되도록 독일어를 가르쳤는데요. 마침 그를 가르치게 된 독일어 선생님이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선생님은 드보르자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음악가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아들을 응원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드보르자크는 1857년 16세의 나이에 프라하로 가 오르간 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의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음악 공부를 하는 데 돈이 부족해, 항상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그는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렸습니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녀봤지만 쉽지 않았죠. 그러다 힙겹게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 연주하는 한 악단에 들어가 비올라 연주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3년 후인 1862년엔 체코 국립극장 오케스트라에 비올라 연주자로 입단했는데요. 이때부터 사정이 좋아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10년 가까이 일을 했으나 집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름도 특별히 알리지 못했습니다. 바쁜 공연 일정에 쫓겨 다른 일을 할 시간도 잘 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업을 찾아 헤매야 했죠.
그러나 드보르자크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연주보다 작곡에 더 큰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친구들의 도움으로 비싼 연주회를 종종 볼 수 있었는데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작곡에 대한 꿈을 조금씩 키우며 습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국립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바쁘게 일할 때도 열심히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체코 대표 작곡가였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이 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엔 그의 음악 세계가 더욱 넓어졌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의 음악을 들으며 기존 독일 중심의 음악 공부에서 벗어나, 체코 음악을 비롯해 동유럽 음악에 대해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다른 특색을 깨닫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그는 작곡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됐죠.
기나긴 고난에 조급할 법도 하지만,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교향곡 1번, 2번 등을 썼지만 곧장 발표하지 않고 실력을 향상시키며 계속 작품을 가다듬었습니다.
마침내 이 지난한 여정에도 끝이 찾아왔습니다. 1871년 오케스트라에 과감히 사표를 냄으로써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인데요. 자신이 진짜 원하는 작곡을 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작은 교회에서 돈을 적게 받고 연주를 하는 대신, 남는 시간에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오랜 시간 탄탄하게 쌓아올린 실력은 결국 세상이 알아보는 법이죠. 드보르자크는 틈틈이 콩쿠르에 도전했는데, 오스트리아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됐습니다.
여기서 5년 치의 장학금을 받게 되며 생활고가 한 번에 해결됐습니다. 한해 장학금이 이전에 드보르자크가 벌었던 1년 수입의 두 배에 달했죠.
요하네스 브람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적 거장들도 그를 잇달아 알아봤습니다. 오스트리아 콩쿠르 당시 심사위원들은 입을 모아 드보르자크를 극찬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브람스가 그의 음악에 흠뻑 빠졌습니다.
브람스는 그에게 오스트리아의 대형 출판사를 소개했고, 이 출판사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같은 춤곡을 드보르자크에게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슬라브 무곡'입니다. 드보르자크는 슬라브 무곡으로 단숨에 유럽 전 지역에 명성을 알렸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프라하에서 연주 여행 중 드보르자크의 음악에 빠져 그를 만났습니다.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드보르자크와 매일 만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정도죠. 차이코프스키는 이후 러시아로 돌아가 그의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드보르자크의 근면함은 성공 이후에 더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유명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고통도 겪었는데요. 세 아이를 연이어 잃을 슬픔도 극복하고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50대가 되어 프라하 음악원 교수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892년 51세에 미국의 재력가이자 문화계 유명 인사였던 자넷 서버로부터 그가 설립할 내셔널 음악원의 원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안락한 프라하 생활을 뒤로하고 과감히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음악원엔 다양한 인종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요. 덕분에 그는 이곳에서 흑인 음악과 인디언 음악을 접하게 됐습니다. 드보르자크는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음악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다른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접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감하고 새로운 도전으로 대작 '신세계로부터'가 탄생했습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 열렸던 이 곡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유모레스크', 오페라 '루살카' 등 다양한 색채의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드보르자크는 체코 음악사, 나아가 세계 음악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게 됐습니다.
드보르자크의 삶을 살펴보고 나니, 왠지 힘이 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때로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가 된 것만 같은 좌절감을 느끼곤 합니다.
시지프스는 매일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립니다. 하지만 바위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하죠. 시지프스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주저앉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드로브자크는 그런 수많은 시지프스들에게 희망과 울림을 줍니다. 최고의 재능은 집념과 끈기라고. 이 재능을 가꾼다면 언젠가 문이 열리고,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