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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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처리가 여야 간 합의로 9월 27일로 연기됐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넘게 이 법안을 놓고 벌어진 갈등과 혼란상을 보면 대한민국 국회에서 의회민주주의 정신이 존재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절차적 민주주의’는 깡그리 무시됐고 타협과 협의의 정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무리수와 과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는 지난 1년 넘게 여당이 독점해 온 국회 상임위원장을 다시 배분하기로 하면서 7개 상임위원장은 국민의힘이 갖는 것으로 합의했다. 지난 8월 초 합의 당시 상임위원장 교체 시점을 8월 25일로 못 박았다. 언론중재법안 소관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도 국민의힘이 맡기로 했다. 여당은 야당에 위원장을 넘겨주기 전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다보니 무리수를 두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법사위원장을 야당에 넘겨주기로 한데 대해 강성 지지층의 비판이 쇄도하는 상황에서 언론중재법을 관철하지 못한다면 당이 걷잡을 수 없는 내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감이 크게 작용했다.

與, 법안 상임위 처리 과정에서 온갖 꼼수·무리수 동원


법안 논의의 첫 단계인 문체위 소위원회 회의 때부터 의회민주주의는 골방에 처박힌 꼴이 됐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요구한 소위 회의 공개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법안을 밀어붙였다. 기존 발의됐던 법안에서 내용을 수정한 위원회 대안을 만들어 표결한 뒤에야 그 내용을 야당에 공개했다. 야당 의원들에게 법안의 내용도 모른 채 표결에 임하라고 했으니 이런 비민주적이 없다. 그래 놓고 “야당과 정부 측의 의견도 들어 대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고 발뺌했다.

문체위 전체회의에서 여야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안건조정원회를 소집했다. 안건조정위 제도는 여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여야 간 이견이 있을 경우 협의 기간을 90일까지 갖도록 했다. 2012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국회선진화법의 일환으로 주장해 도입됐다. 안건조정위는 여당 3명, 야당 3명으로 구성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법안 처리를 위해 범여권인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을 안건조정위 야당 몫 위원으로 끼워 넣어 의결했다. 안건조정위 위원 3분의 2가 찬성하면 협의 기간 90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악용한 꼼수가 아닐 수 없다.

여당은 법사위 처리 과정에서 더 개악했다.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는 문구에서 ‘명백한’을 빼버려 언론의 중과실 추정 범위를 더 넓힌 것이다. 절차도 논란을 낳았다. 법사위 권한을 축소해 체계·자구 심사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관련 법 개정안까지 밀어붙인 민주당은 언론중재법안 내용은 수정함으로써 스스로 세운 원칙을 무너뜨렸다. 또 법사위 권한 축소 법안이 발효되기 전에 ‘마지막 찬스’를 활용해 법안을 개악했으니 거대 여당의 횡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당이 문체위→법사위를 거쳐 8월 임시국회 회기 내 본회의 처리까지 밀어붙였지만 힘에 부쳤다. ‘북한만 제외하고 모두 반대하는 법안’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국내외에서 비난 성명이 줄을 이었다. 국내에서는 한국기자협회·신문협회·노조 등 언론 관련 단체뿐만 아니라 대한변호사협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 언론 자유를 위해 싸웠던 자유언론실천재단 등이 잇달아 반대에 나섰다. 좌우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세계신문협회·국경없는기자회·외신기자클럽·미국기자협회 등 국제 언론 단체들도 줄줄이 반대에 동참했다. 유엔 인권이사회도 우리 정부에 언론 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의 뜻을 전했다. 이 법안이 ‘언론·표현의 자유 훼손법’으로 보기 때문이다. 댄 큐비스케 미국기자협회 국제커뮤니티 공동 의장은 “독재 국가는 항상 그렇게 한다”고 했다. 뱅상 페레뉴 세계신문협회 최고경영자는 “법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최악의 권위주의 정권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이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비유되는 것 자체가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나라 안팎에서 언론중재법에 대해 이런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많은 독소 조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로 인한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손해 배상액을 정할 수 있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미 ‘허위·조작 보도’는 형법의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고 민법의 손해 배상까지 인정하는 마당에 과잉·이중 처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손해 배상에 하한선을 둔 것도 헌법상 ‘과잉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 언론사에 고의·중과실이 있다고 추정하고 입증 책임도 언론사에 적용한다는 조항에 대해선 비판 기능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고의·악의를 주장하는 측이 입증해야 한다.

‘진실하지 않은 경우’, ‘사생활의 핵심 영역 침해’ 등을 이유로 언론 보도 열람 차단을 청구할 수 있게 한 것은 요건이 분명하지 않아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많다. 정정 보도 시 최초 보도의 2분의 1 크기로 한 것도 언론사의 편집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 등 독소 조항 많아


그럼에도 여당이 이 법안을 강행하는 것은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친조국’ 인사들이 법안 처리를 주도해 왔다. 이스타항공 비리 혐의로 구속된 이상직 전 의원도 이 법안을 주도해 왔다. 조국·이상직 의혹과 울산시장 선거 의혹, 월성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 등 정권에 불리한 언론 보도를 막아 집권을 연장하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것이다.

8월 중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공언하다가 한 달 늦춘 것도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송영길 대표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송 대표는 “언론중재법을 포함한 모든 결정은 내년 대선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되는지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도층의 민심 이반 현상이 나타나자 강행 처리에서 급선회한 것이다. 민의가 아니라 선거 유불리를 따져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여당이 지금까지 주장해 왔던 ‘국민피해구제법’이라는 것도 위선임이 드러난 셈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양당 의원과 언론계, 언론 관련 전문가 등 8명으로 협의체를 만들어 9월 26일까지 대안을 내놓기로 했지만 합의는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여당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강성 지지층은 언론중재법 처리를 늦추자는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을 보냈다. 여당 지도부도 당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이런 강성 지지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고의·중과실 추정’을 놓고도 국민의힘은 삭제하기로 합의했다고 한 반면 민주당은 법안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논의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일단 여론의 화살을 피하면서 협의체를 법안 강행 명분 쌓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야당인 국민의힘의 대응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당이 몇 달 전부터 이 법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차근차근 행동에 옮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은 녹취록, 토론회 개최 문제 등을 놓고 당 대표와 대선 주자 간 집안싸움에만 정신이 팔렸다. 무엇이 시급한 현안인지 점검조차 안 한 듯하다. 뒤늦게 여론이 크게 악화하자 나섰지만 시간만 벌었을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홍영식 논설위원 겸 한경비즈니스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