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채권 금리가 속락하면서 투기등급 채권에도 매수세가 역대급으로 몰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채권 금리가 속락하면서 투기등급 채권에도 매수세가 역대급으로 몰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단 사라’

미국 월스트리트에 채권 투자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 받는 채권에 기관투자가들의 매수세가 붙은 것이다. 작년 봄 연 10%를 훌쩍 넘었던 미국의 투기등급(하이일드) 채권 수익률이 연 3%대까지 곤두박질했다.

미 채권 시장에서 과거엔 잘 취급하지 않던 작은 기업의 채권까지 사재기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우량 등급 채권만으로는 도저히 기대 수익률을 맞출 수 없어서다.

블룸버그 바클레이스에 따르면 미 투기등급 채권의 평균 수익률은 최근 연 3.53%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최저치다. 이달 초 현재 연 3.82% 수준으로 소폭 상승했다.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직전과 비교하면 1%포인트 이상 낮은 숫자다. 이 채권 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최고 연 22.81%, 팬데믹 직후였던 작년 3월엔 연 11.57%까지 치솟았다.
미국의 투기등급 채권 수익률은 작년 팬데믹 직후 연 10% 이상으로 치솟았으나 현재 연 3%대까지 추락한 상태다. 블룸버그 바클레이스 제공
미국의 투기등급 채권 수익률은 작년 팬데믹 직후 연 10% 이상으로 치솟았으나 현재 연 3%대까지 추락한 상태다. 블룸버그 바클레이스 제공
투기등급 채권 금리가 역대급으로 낮아지면서 채권 운용역들에겐 커다란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는 게 WSJ의 설명이다. 기대 수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물론 향후 부실화 가능성 부담까지 떠안게 돼서다.

영국계 자산운용사인 슈로더의 데이비드 크누슨 미주 신용조사 책임자는 “지금 시장에서 수익률 기대치를 맞추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금융회사 경영진은 채권 운용역들을 대상으로 “더 높은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고 있다. 다른 자산 가격이 대부분 많이 뛴 상태여서 마땅한 운용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운용역들이 역대급으로 낮은 수익률을 보이는 투기등급 채권에 주목하고 있는 배경이다. ‘트리플 C’ 이하의 하이일드 채권을 매입하면, 높은 등급의 채권보다 조금이라도 수익을 더 낼 수 있다.

올해 초만 해도 투자자들이 트리플 C 등급을 사들일 경우 연 2.79%포인트의 추가 수익(스프레드)을 기대할 수 있었다. 바로 위 등급의 채권과 비교해서다. 하지만 지난 7월 이 추가 수익은 연 1.51%포인트로 축소됐다. 2007년 등 예외적인 시기를 빼놓고선 지난 20년래 가장 낮은 수치다.

일부 투자회사는 색다른 투자 전략을 취하고 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매닝&네이피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작년 가을부터 S&P 등 3대 평가사에서 등급을 매기지 않는 회사채를 골라 투자하고 있다. 채무 불이행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거래 빈도가 낮은 회사채를 찾아내는 게 관건이다. 다만 이를 위해선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3대 신용평가사가 평가하지 않는 채권에 투자하는 대신 연 5% 정도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일반 하이일드 채권의 평균 수익률 대비 최대 1.5%포인트 정도 높다.

다만 유동성이 낮은 채권을 보유하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전략이라는 지적이다. 시장 침체기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채권을 시장에 매각해야 하는데 유동성이 낮은 채권을 파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전체 채권 투자에서 제한적으로만 이런 전략을 활용해야 하는 이유다.

북유럽 은행들이 신디케이션(차관단 구성) 방식으로 발행하는 투기등급 채권 물량이 급증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금융정보 회사인 스탬데이터에 따르면 고수익-고위험의 노르딕(북유럽계 주관) 채권 발행액은 올 들어 160억달러 규모로 집계됐다. 역대 최대인 것은 물론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전체보다도 5%가량 많다.
미국 투자회사들의 채권 매입 수요가 급증하면서 북유럽 금융회사들의 투기등급 채권 발행 물량이 크게 늘고 있다. 스탬데이터 제공
미국 투자회사들의 채권 매입 수요가 급증하면서 북유럽 금융회사들의 투기등급 채권 발행 물량이 크게 늘고 있다. 스탬데이터 제공
크리스티안 판데 혼 악틱증권 기업금융 책임자는 “조금이라도 수익률을 높이려는 미국 투자자들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발행 물량이 크게 늘었다”며 “전체 발행 물량의 10%를 미 투자자 한 곳이 가져간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엔 보기 어려웠던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도 미국 국채 등 채권을 쓰레기에 비유했다. 그는 이달 3일 투자전망 보고서를 통해 “높은 가격과 낮은 금리를 고려할 때 채권은 투자 쓰레기”라고 혹평했다. 미 중앙은행(Fed)이 조만간 테이퍼링(채권 매입 축소)에 나설텐데,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 금리는 급등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예측이다.

그는 “현금은 오래 전부터 쓰레기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경쟁자가 생겼다”며 “중·장기 채권펀드는 분명 그 쓰레기통에 포함될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