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ARM 상장 기념 사진. ARM 커뮤니티
1998년 ARM 상장 기념 사진. ARM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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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발행된 한경 엣지(EDGE) 뉴스레터에서 삼성전자 등이 엔비디아의 ARM 인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분석했습니다.(한경닷컴이나 포털 등에서 '엔비디아의 M&A에 삼성·테슬라·구글이 딴죽거는 사연 [실리콘밸리 나우]'을 검색하시면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후 'ARM이 어떤 기업인지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 '왜 삼성전자는 ARM처럼 CPU(중앙처리장치) 아키텍처를 개발하지 못하냐' 등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주 뉴스레터에선 ARM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고 ARM을 둘러싼 산업 환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겁고 비싼 인텔 CPU 싫다"...ARM은 작고 효율적인 CPU 개발

먼저 ARM의 역사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ARM(Advanced RISC Machines)은 1978년 영국 캐임브리지에서 설립된 PC 제조업체 '아콘(Acorn, 에이콘으로도 불림)'이 모태입니다. 창업자는 프로세서 엔지니어 출신인 크리스토퍼 커리(Christopher Curry)와 헤르만 하우저(Herman Hauser)입니다. 아콘이란 이름은 애플(APPLE)보다 전화번호부에서 앞서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1983년 BBC가 '컴퓨터 문맹 퇴치'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이 때 아콘의 PC가 채택됐다고 합니다. 영국 전체 학교의 80%에 아콘 PC가 보급됐다고 합니다. 아콘은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PC 관련 스타트업'으로 불립니다. ARM의 뿌리는 아콘에서 PC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를 개발하던 디자인그룹입니다.

당시 대서양 건너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인텔이 1981년부터 PC용 CPU로 'X86' 아키텍처를 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에 많은 계산을 할 수 있지만 많은 양의 트랜지스터를 써 전력이 많이 드는 것이 단점입니다. 쉽게 말해 용량은 크고 성능은 좋은데 전기를 많이 먹고 무겁다는 게 단점이었죠. 어찌됐든 인텔은 X86 기반 CPU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출시해 현재까지 PC, 데이터센터용 CPU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영국 아콘의 아르키메데스 PC
영국 아콘의 아르키메데스 PC
아콘은 인텔의 X86보다 좀 더 전력이 적게 들고 효율적인 프로세서를 고민했습니다. 학교에 보급하는 아콘 PC에 들어갈 칩을 개발하는만큼 원하는 것만 빠르게 계산할 필요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원하는 것만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CPU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내부에서 CPU 개발에 매진했고 그래서 탄생한 제품이 'ARM(Arcon RISC Machine)' 시리즈입니다. 현재 사명 ARM과 약자는 같은데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모토로라의 CPU를 썼던 아콘은 1985년부터 ARM으로 대체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아콘은 자사 아르키메데스 PC에 ARM 프로세서를 탑재시켰고, 1986년부터는 저전력 고효율 프로세서를 원했던 애플과 함께 CPU를 공동 개발합니다. 1987년엔 ARM 2 기반 PC가 출시됩니다.

애플과 'RISC' 기반 합작사 설립...애플 PDA에 적용

1990대 들어 아콘과 파트너사인 미국 VLSI는 ARM CPU 공동 개발에 나섭니다. 애플의 첨단 기술그룹도 아콘과 접촉해 저전력 CPU 개발을 위해 손을 잡습니다. 이렇게 해서 1991년에 애플, VLSI, 아콘의 조인트벤처가 설립됐고 이 회사가 ARM입니다. VLSI는 시설, 애플은 돈, 아콘은 인력을 대는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PC 시장에서 인텔에 밀린 아콘은 결국 2001년 문을 닫습니다. RISC 기반 프로세서로는 인텔 CPU 기반 PC와 경쟁이 안 됐던 영향이 큽니다.

아콘에서 분리된 ARM은 전력 소모가 적은 SOC(통합칩셋) 타입 CPU 설계를 목표로 했습니다. 1993년 애플의 PDA '뉴튼'에 ARM의 CPU가 적용되긴 했는데, PDA가 시장에서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빛을 못봤는데, 향후 저전력 CPU 개발에 본격적인 토양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칩을 직접 만들지 않고 설계 같은 지적재산을 로열티를 받고 판다는 전략도 이 때 정해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ARM의 왜 사명이나 프로세서 명에 'RISC'가 들어갈까요. CPU의 아키텍처, 쉽게 말해 큰 기술 줄기는 CISC와 RISC로 구분됩니다. CISC는 인텔의 X86처럼 한 번에 많은 것을 처리하고, 복잡한 연산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대신 소비전력이 크고 발열이 있습니다. RISC는 이에 대항해 미국 카네기멜론대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됐다고 하는데, 명령어를 줄이고 회로를 단순화해서 연산의 고속화를 노린 아키텍처입니다. 아콘은 인텔의 X86에 대항해 RISC 기반 CPU 설계에 주력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RISC가 CPU 명이나 사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1994년 노키아가 채택해 '대박'...1998년 나스닥 상장

이렇게 탄생한 ARM은 조용하게 RISC 기반 CPU 아키텍처를 지속적으로 개발합니다. ARM9, ARM10, ARM11 등 지속적으로 시리즈를 출시했고요. 저전력, 작은 크기 등을 무기로 휴대폰, 내비게이션, PDA 등 소형 가전에 주로 탑재됩니다. 1994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가 ARM 기반 휴대폰용 CPU를 만들고, 이를 노키아에 납품하면서 ARM은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이 해에 노키아에만 ARM 기반 칩을 100억개 이상 판매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8년 ARM은 미국 나스닥과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동시 상장합니다.

ARM은 2000년대 초반 다시 한 번 일어납니다.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ARM의 CPU 아키텍처는 전력이 적게 드는 강점이 있습니다. 공간 상의 제약으로 작은 배터리를 쓸 수 밖에 없는 소형 가전에 유리한 것입니다. 2001년 애플은 ARM 아키텍처를 애플 아이팟에 적용합니다.
ARM의 초기 로고. ARM 커뮤니티
ARM의 초기 로고. ARM 커뮤니티
2010년께부턴 스마트폰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스마트폰에도 PC의 CPU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가 필요하죠. ARM의 아키텍처는 저전력이고 PC보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작업을 하는 스마트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애플 아이폰과 삼성전자 등의 안드로이드폰 모두에 적용됩니다. 미국의 통신칩 전문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업체) 퀄컴이 ARM의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스냅드래곤 같은 AP(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를 개발·판매합니다. 삼성전자, 미디어텍 같은 기업들도 ARM의 아키텍처를 활용해 칩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스마트폰의 95% 이상이 ARM 기반 프로세서를 활용한다고 합니다. 2017년 기준 ARM 코어가 탑재된 프로세서는 전 세계에서 213억개가 팔렸습니다.

휴대폰용 CPU(AP) 시장을 석권한 ARM은 CPU 뿐만 아니라 GPU 아키텍처도 개발해 설계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바로 '말리' 시리즈입니다. ARM이 처음부터 GPU 아키텍처를 설계한 건 아닙니다. 2006년 노르웨이의 팔랑스 마이크로시스템즈(FALANX MICROSYSTEMS) 인수 이후 삼성전자 등에 설계자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팹리스의 팹리스'로 불리는 ARM은 2016년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인수합니다. 최근엔 엔비디아가 소프트뱅크와 ARM M&A 계약을 체결하고 각 국의 심사를 받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인텔 제치고 스마트폰용 CPU 장악

그렇다면 인텔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실상 스마트폰용 CPU 시장에선 ARM에 완전히 밀려버린 건데요. 이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옵니다. 인텔도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인텔은 ARM과 DEC란 업체가 함께 세운 '스트롱암 프로세서'를 인수하고 이를 토대로 엑스스케일(XScale)을 개발합니다. 하지만 인텔은 2006년 엑스스케일을 마벨(Marvell)에 매각합니다. 매각 대금은 6억달러로 당시론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인텔에선 당시 XScale 매각에 대해 '최대의 판단 미스'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에 나름대로 이유도 있었습니다. X86 기반 '아톰'이란 소형 프로세서를 만들었는데 이를 모바일 용으로 발전시킬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잘 되진 않았고요.

여기에 시장을 장악한 ARM은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합니다. 설계자산을 외부와 공유하는(돈은 받고) '개방성' 영향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하지만 인텔은 '폐쇄성'이 특징입니다. 칩의 설계도를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죠. 이런 인텔의 특성 때문에 빠르게 발전하는 스마트폰용 프로세서 시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X86 아키텍처의 기본적인 특징이 저전력, 경량화와도 거리가 멀었고요.
ARM 기반 칩을 탑재한 삼성 갤럭시S5. 한경DB
ARM 기반 칩을 탑재한 삼성 갤럭시S5. 한경DB
그래서 ARM은 스마트폰 CPU 시장의 아키텍처를 장악하고, 퀄컴 삼성 애플 미디어텍 등에 설계자산을 팔아 따박따박 로열티를 받아갑니다. 그런데 의외로 로열티가 비싼 것 같진 않습니다. 로열티는 영업기밀이라 공개하지 않고 있고, ARM이 현재 비상장사라서 정확한 실적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요. 공개된 가장 최근 실적인 2017년을 기준으로 보면 매출은 약 1조6000억원, 영업이익은 약 2600억원 수준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름값'에 비해선 다소 초라한 실적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는 ARM의 매출을 추정했는데 2019년엔 2조1200억원, 2020년엔 약 2조2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ARM이 아키텍처 확장을 위해 과도한 로열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탈(脫) ARM' 움직임...삼성은 자체 CPU 개발 중단하기도

그럼 왜 삼성전자나 퀄컴, 애플은 CPU 아키텍처를 직접 개발하지 않고, ARM 것을 사서 쓰는걸까요. 결국 비용 대비 성능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ARM이 1980년대부터 발전시켜온 스마트폰용 CPU 아키텍처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드는 게 쉬울까요.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고급 인력을 수 년 간 R&D(연구개발)에 투입해야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것입니다. 차라리 ARM에 로열티를 내고 설계자산을 받아서 거기에 자사의 입맛에 맞는 기능을 더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부 기업들은 ARM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인데요 '몽구스'란 이름으로 알려진 프로젝트입니다. 2016년엔 자체 개발 CPU를 스마트폰에 적용하긴 했지만 '성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결국 2019년 삼성전자는 미국에 있는 반도체 연구법인 등에서 개발자 약 300명으로 구성된 몽구스팀을 해체합니다.

사실 반도체기업들이 자체 CPU를 개발해도 장애물은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현재 CPU와 연동된 소프트웨어 등이 ARM 아키텍처와 인텔의 X86 아키텍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CPU를 내놓는다해도 이에 맞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등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아키텍처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해 SW를 개발할 회사가 많을까요. 차라리 기존 강자들에게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릴 겁니다.

강력한 시장 파워를 갖고 있는 애플도 이런 부분에선 고전하고 있습니다. 애플은 작년까지 썼던 인텔 X86기반 CPU 대신 ARM 기반 'M1'칩을 자체 개발해 맥북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M1을 적용한 맥북은 발열이 심하지 않고 속도가 빠르고 배터리가 오래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습니다.
애플 M1칩 발표. 연합뉴스
애플 M1칩 발표. 연합뉴스
이런 점을 볼 때 2019년 삼성전자의 몽구스 팀 해체와 관련해 '기술력 부족' 등을 지적하지만,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듭니다. 삼성전자는 몽구스팀을 해체하고 일부 인력을 NPU(신경망처리장치)나 GPU(그래픽처리장치) R&D 쪽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택한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ARM의 경쟁사는 없을까요. RISC 아키텍처를 활용해 '탈 ARM'을 외치는 진영이 있습니다. 바로 'RISC V'(리스크파이브)인데요. 2016년에 공식 출범했습니다. 2010년 미국 UC버클리에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화웨이, 테슬라 등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ARM과 달리 현재까지는 무료 오픈소스입니다. ARM에 종속되는 게 부담스러운 ARM 고객사들이 RISC-V를 통해 독자칩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고하는데, 업계에선 "리스크 분산 차원에서 돈을 투자하는 것이고 움직임이 적극적이진 않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