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전지 핵심소재인 양극재를 생산하는 에코프로비엠이 10조원대 대규모 계약을 성사시켰다. 중견기업이 10조원대 공급 계약을 하는 건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SK이노베이션과 10조원 계약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왼쪽)과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가 서울 SK서린빌딩에서 대규모 양극재 조달 계약을 9일 맺었다. /SK 제공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왼쪽)과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가 서울 SK서린빌딩에서 대규모 양극재 조달 계약을 9일 맺었다. /SK 제공
9일 에코프로비엠은 SK이노베이션과 10조1102억원 규모의 전기차용 하이니켈 양극재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계약 기간은 2024년부터 2026년 말까지 3년간이다. 이날 주식시장 개장 전 공시가 나온 뒤 에코프로비엠은 장중 40만원(18.80%)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날 계약은 기존 에코프로비엠의 양극재 생산능력을 뛰어넘는다. 에코프로비엠은 2023년 연간 6만t 수준의 하이니켈 양극재 생산능력을 갖출 예정이었다. 이번 계약을 따져보면 연간 10만t의 공급능력이 필요해 추가 증설이 불가피하다. 한상원 대신증권 연구원은 “연내 미국 공장 증설이 공식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업 성장사 보니

'교토의정서'에 눈 번쩍…친환경만 보고 달렸다
이번 10조원 계약은 에코프로 역사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다. 33㎡(약 10평) 사무실에서 기업을 일군 지 23년 만에 10조원 계약을 따내는 기업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이동채 에코프로 회장은 경북 포항의 한 시골집에서 1남7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집을 떠나 대구로 유학길을 떠났다. 대구상업고를 졸업한 그는 은행원으로 취직해 영남대를 야간대학으로 다니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대졸 학력을 인정받으려면 퇴사 후 재입사해야 한다는 규정에 막혔다. 재입사에 실패한 그는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업무에 퇴사,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1984년부터 6년간 회계법인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창업에 대한 꿈이 있었다. 1996년 수출입 사업으로 호기롭게 창업했지만 외환위기 칼바람 속에서 쓰러졌다. 이후 1997년 우연히 보게 된 ‘교토의정서’ 체결 소식을 듣고 이 회장은 머리가 번뜩였다. ‘지구 온난화는 세계 문제다. 앞으로 더 심각해질 테니 산업이 구조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다.’

그렇게 지금의 에코프로는 1998년 10월 22일 서울 서초동 골목 내 건물 4층에 있는 10평짜리 단칸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직원은 이 회장과 이전 수출입 사업에서 함께한 여직원(현재 최선미 에코프로 이노베이션 경영지원팀장), 단 두 명이었다. 처음에는 환경 소재 사업과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케미컬 필터 등을 개발해 생산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던 중 2004년 정부가 주도해 만든 ‘미래성장동력-초고용량 리튬2차전지 개발 컨소시엄’에 참여하게 됐다. 여기서 제일모직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제일모직과 공동으로 양극재의 원재료가 되는 전구체 사업을 했다. 그러다 2006년 제일모직이 전구체뿐 아니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양극재 기술과 영업권을 인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 회장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투자에 나섰다. 2007년 관련 사업을 넘겨받고 1년도 되지 않아 니켈계 양극소재 40t과 전구체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가 준공됐다. 3월에는 양극소재 제1공장까지 문을 열었다.

그렇게 양극재 사업의 서막이 열렸다. 하지만 수익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권우석 에코프로비엠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수익을 못 내고 투자만 해야 했던 10년여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고 했다. 장기간 투자 끝에 이제는 이익을 내고 있다. 만드는 대로 돈이 되는 제품이 됐다.

○향후 전망은

2016년 998억원이던 매출은 5년 만인 올해 1조3000억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2025년 9조원대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2차전지주는 전기차 시장의 구조적 성장세를 이유로 증설이 주가에 빠르게 반영되는 특성이 있다. 먼 미래의 실적을 현재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에 반영한다는 뜻이다. 에코프로비엠 역시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80배에 달하지만 2023년 실적을 적용하면 23배로 낮아진다.

증권사들이 목표주가를 올리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날 공급 계약 공시가 나온 뒤 대신증권은 50만원의 목표주가를 제시했다. 미래에셋증권도 뒤이어 53만원의 목표주가를 내놨다. 김철중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대규모 수주 계약이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4년 소니 납품을 계기로 비약적 성장을 한 것처럼 이번 납품이 에코프로비엠의 성장에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란 전망이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