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한국에 주어진 '운명의 시간'
누구는 “위기가 기회”라고 한다. 이게 말이 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한다. ‘외부위협’ 인식이 ‘내부갈등’을 압도할 정도로 달라져야 하고, 과거에 없던 행동의 변화가 이어져야 한다. 운도 따라야 한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호 1호를 쏘아올렸을 때 미국의 위기감은 엄청났다. 행동의 변화가 바로 일어났다. 국가항공우주법 제정과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는 프로젝트만이 아니었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적(敵)으로부터의 기술적 충격에 대응하라”는 미션이 떨어졌다. 인터넷, GPS, 구글 지도, 시리(Siri), 아이폰,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 첨단기술의 산실인 ‘고등연구계획국(ARPA)’이 그때 탄생했다. 패권 도전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미국이 이번엔 ‘혁신·경쟁법’을 내놨다. ARPA 모델이 국방을 넘어 국토안보, 첩보, 에너지, 바이오의료, 헬스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지금부터 타깃은 중국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월 이후 7개월 만에 나눴다는 전화 대화가 눈길을 끈다. 백악관은 “미·중 경쟁이 충돌로 바뀌지 않도록 양국의 책임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승부가 당장 판가름이 날 게 아니어서 ‘전략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미·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미·중 경제는 얽혀 있다. 미국이 원하는 정도의 디커플링, 중국이 바라는 수준의 기술자립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미·중 패권경쟁의 핵심이 첨단기술인 이상 양국은 각자 설정한 시간에 국가 역량을 집중시킬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술을 장악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중국대로 최대한 빨리 기술자립으로 간다는 계획이다.

양국 싱크탱크도 정면충돌하고 있다. “AI, 생명공학, 양자컴퓨팅, 반도체, 자율·로봇공학, 차세대 통신·네트워킹, 첨단 제조, 에너지 시스템 등 8개 분야에서 중국이 꼼짝 못 할 기술(choke point)을 찾아야 한다.”(미국 국가AI안보위원회·NSCAI) “미국이 중국의 목을 조를 카드(chokehold)로 쓸 기술은 첨단 노광장비, 칩제조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등 25개다. 이에 맞서 35개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해야 한다.”(중국 과학원) ‘기술 대(對) 기술’의 전쟁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 중국의 기술자립 중 어느 게 먼저 오든 한국에는 ‘쇼크’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10년 동안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매진하겠다.” 8대 국가 전략산업, 7대 과학기술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온 선언이다. 중국이 말하는 저 10년이 한국에는 ‘운명의 시간’일지 모른다.

1980년대 미국의 소련 봉쇄 정책은 한국에 ‘3저 호황’을 가져다줬다. 미·일 무역분쟁은 한국 기업이 자동차·반도체 시장을 치고 들어가는 호기로 작용했다. 미·중 충돌이 한국에 똑같은 행운을 준다는 보장이 없다. 돌아가는 판세가 심상치 않다. 미·중 충돌 초기 미국이 중국의 추격을 늦춰줄 것이란 기대는, 갈수록 세지는 중국의 기술자립 의지로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시장에서는 미국·일본·유럽연합(EU)·대만 등이 다 경쟁자다. 소재·부품·장비 기술 의존도로 보면 한국이 일본의 수출규제만 걱정할 때가 아니다.

정부는 내년에 약 30조원의 연구개발(R&D) 예산안을 짰다고 설명했다. 부처별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R&D 예산을 늘리면 뭐하는가. 국가 안전보장과 난제 해결이란 ‘미션’에 전략적 자원배분이 불가능한 게 지금의 구조다. 실패 확률은 높지만 파급효과가 큰 분야에 도전하지 않는데 ‘파괴적 혁신’이 일어날 리 없다.

큰 나라 미국도 ‘외부위협’이 닥치면 국가 역량을 결집한다. 한국은 ‘부처’만 있고 ‘국가’는 없다. 미국은 ARPA 모델을 통해 최고 인재를 찾아 R&D 기획부터 수행까지 전권을 준다. 한국은 관료가 R&D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한국이 근대화에서 일본에 뒤처진 대가는 혹독했다. 중국보다 먼저 경제개발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중국이 10년 동안 하나의 칼을 갈겠다는 지금, 한국에서는 대선을 둘러싼 ‘내부갈등’이 ‘외부위협’을 압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