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 그리고 '울게 하소서'[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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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선율과 목소리. 그러면서도 깊고 묵직한 울림이 온몸과 마음에 전율을 일으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과 잘 어울리죠.
영화 '파리넬리'(1994)로도 잘 알려진 '울게 하소서'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주인공 파리넬리가 이 곡을 부르는 장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자주 회자되고 있죠.
그런데 이 곡을 만든 인물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시나요. 노래는 유명하지만, 누구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일 출신의 음악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의 작품입니다.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란 타이틀도 나눠갖고 있습니다.
‘울게 하소서’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아리아인데요.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는 1711년으로, 무려 310년 전에 해당합니다. 300년이 지나도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만들었단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음악뿐만 아니라 헨델의 음악은 지금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의 '사라방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할렐루야 합창곡'은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전 세계 공연장에서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 비해 헨델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곡처럼 헨델 스스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작품 세계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헨델은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린 과감한 선택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발휘한 순발력이 큰 도움이 됐죠.
헨델의 결단력은 음악 인생의 출발점과 전환점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발사 겸 외과의사(당시엔 이발사가 군인들의 부상 치료 등을 해주는 의사로도 활동)였던 아버지의 큰 반대에 부딪혔죠.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길 바랐고, 헨델은 이에 따라 할레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고 1년 만에 자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헨델이 성공 가도에 오른 것도 망설임 없는 선택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리날도’를 포함해 총 44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쓰며 이름을 알렸는데요. 이런 유명세를 누린 배경엔 이민까지 감행한 특단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하노버 궁정의 음악 감독으로 고용돼 부족할 것 없는 생활도 하게 됐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오페라가 영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하자, 1710년 과감하게 런던으로 떠났습니다. 그 시대엔 이민을 가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는데요. 헨델은 낯선 땅에서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죠.
운도 따랐던 것일까요. 그가 영국에 간 지 1년 만인 1711년, 오페라 '리날도'가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공연에서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성을 보내며 열광했습니다.
'울게 하소서'의 감동뿐 아니라 이야기가 가진 힘도 컸습니다. ‘리날도’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리날도 장군이 마술사 아르미다로 인해 성에 갇힌 알미레나를 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헨델의 아이디어도 빛났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온갖 연출 아이디어를 냈죠. 덕분에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의 무대가 만들어졌고, 관객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유의 친화력 덕분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귀족과 왕족 사회에 빠르게 뿌리내리고 네트워크를 확장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왕실의 지원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앤 여왕의 생일에 맞춰 그녀에게 노래를 헌정했는데요. 여왕은 이를 듣고 감동해 그에게 매년 200파운드를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이방인이 여왕에게 용기 있게 노래를 선물하고, 이로써 큰 지원까지 받아내다니 정말 대단하죠.
물론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가 독일에 있을 때 하노버 궁정의 음악 감독이 됐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볼까요.
그는 영국으로 떠나면서 영리하게도 하노버 궁정에 휴직 신청을 했습니다. 영국에서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니, 일단 게오르크 대공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떠난 것이죠. 하지만 예상보다 영국에서 잘 풀리자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과 운명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인 것 같습니다. 앤 여왕이 1714년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게오르크 대공이 영국의 새 국왕으로 오게 된 것인데요.
게오르크 대공이 앤 여왕의 육촌이었던 것입니다. 앤 여왕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여왕의 뒤를 이어 조지 1세가 됐습니다. 이로써 헨델은 과거에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지 못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위기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앤 여왕 때처럼 멋진 음악을 만들어 왕에게 헌정했습니다. 마음이 풀린 왕은 그에게 다시 지원을 해줬죠.
음악가로서의 생명력이 완전히 끊어질 뻔했을 때도 그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헨델의 오페라는 오랜 시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1728년 존 게이의 '거지의 오페라'라는 작품으로 인해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거지도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는데요. 오페라가 귀족, 왕실의 이야기에 국한돼 있고 관객층도 이에 한정된 것을 비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기존 오페라 시장의 중심에 있던 헨델의 작품에서 등을 돌렸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것이 과거의 것을 밀어냈을 때,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헨델은 더 새로운 것으로 맞섰습니다.
'오라토리오'라는 형식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인데요. 오라토리오는 기존의 오페라보다 짧고 간단합니다. 화려한 무대 연출도 하지 않아 제작비도 적게 들죠.
사람들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라토리오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작품을 다시 보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합창곡'도 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에 나온 곡입니다.
누군가는 그가 뛰어난 수완 덕분에 유명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엔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했던 열정이 깔려 있습니다.
헨델이 1751년 앞이 보이지 않는 실명 상태에 이르렀지만 작품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음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불멸의 명곡이 탄생할 수 있는 건 이를 뛰어넘는 음악가의 투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