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기금 500억'으로…빌딩 사는 산업안전보건공단
삼성그룹이 2019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부한 500억원 규모 ‘반도체 백혈병 기금’이 애초 기금 조성 취지와 다르게 엉뚱한 건물 매입에 투입될 예정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회적 합의로 민간 기업이 큰마음 먹고 낸 돈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냐”는 거센 비판이 나온다.

30일 박대수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삼성이 기탁한 기부금 중 380억원을 경기 군포시에 있는 건물(사진)을 사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막바지 매입 협상을 하고 있다. 공단은 이 건물을 산업안전 분야를 연구하는 산하 미래전문기술원 청사로 사용할 계획이다.

삼성은 2007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 유족, 반도체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인권단체 ‘반올림’과 장기간 갈등을 빚어오다 2018년 11월 중재 합의를 이뤘다. 이듬해 합의 이행 차원에서 공단에 500억원을 ‘산업안전 보건기금’으로 기탁했다. 돈을 받은 공단은 기부금 사업계획서를 통해 “전국 각지에 산업안전보건센터를 세워 산재 예방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경기도에 전자, 서울에 서비스·건설, 울산에 화학 산업과 관련한 센터를 세워 산재 예방 연구를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공단은 올해 말까지 기부금 500억원 중 485억원을 써야 한다. 하지만 9월 기준 집행금액은 2억원에도 못 미친다. 돈을 쓰지 못해 발생한 이자 수입만 4억원이 넘는다. 기부받은 지 만 3년이 되는 내년 6월까지 기금을 소진하지 않으면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라 245억4000만원의 증여세를 떼일 판이다. 이에 대해 공단 측은 “고용노동부의 승인이 늦어져 사업 진행이 더뎠다”고 해명했다.

일각에선 시간에 쫓긴 공단이 기금을 소진하기 위해 기부금 사업계획에 맞지 않는 건물을 부랴부랴 구입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계획대로 전국 각지에 인프라를 구축하는 대신 경기 외곽에 있는 건물 하나를 사는 데 기부금의 80%를 사용하는 게 적절하냐는 문제 제기다.

이에 대해 공단 측은 반올림 의견을 수렴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공단 관계자는 “반도체 노동자의 희생으로 조성한 기금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인프라로 사용할 건물”이라며 “반도체 분야 산재 예방에 집중하는 차원에서 경기도 내 반도체 공장들과 접근성이 좋은 군포시 건물로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업계에선 “군포시에는 경기도 전체 전자 기업의 5.1%만 있을 뿐이며 이는 도내 지방자치단체 중 8위 수준”이라며 공단의 주장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박 의원은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의 염원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기부금 집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