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트럼프는 쉬운 상대였다
“바이든에 비하면 트럼프는 쉬운 상대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본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푸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 정부가 전개하는 경제정책의 핵심은 ‘바이 아메리카, 메이드 인 아메리카’다. ‘미국 제품을 사고, 미국서 생산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정치적 구호와 언론플레이에 그쳤던 트럼프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우선 전략적이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 리스트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첫 번째 타깃이 반도체다. 지난 4월 12일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화상회의가 시작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기판의 기초 소재인 웨이퍼를 손에 들고 “이것은 오늘의 인프라다”고 정리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은 경제관료가 아니라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 예일대 법대 출신으로 43세에 불과한 그는 미국 안보와 국방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반도체 수급난은 미 산업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 주도의 중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의 TSMC부터 백기를 들었다. 백악관 회의 한 달 뒤 120억달러(약 15조원)를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5㎚(나노미터) 공정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은 삼성전자 차례. 발표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지만, 170억달러(약 20조원)가 들어가는 ‘제2의 파운드리 미국 공장’은 확정적이다.

미국은 배터리 공장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GM 합작사 얼티엄셀즈를 통해 2개의 공장을 짓거나 짓기로 했고, 5조원을 투자해 단독 공장도 설립하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은 포드와 합작해 총 13조원을 투자, 배터리 합작공장 3곳을 짓기로 했다.

바이든 정부의 압박 방식도 치밀하다.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다. ‘칩스(CHIPs)’로 불리는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은 2024년까지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신설 및 현대화에 5년간 520억달러 규모의 자금지원과 투자비의 40% 세액 공제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근이다. 대신 2025년까지 핵심 부품의 85% 이상을 자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은 전기차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채찍이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팔려면 공장부터 지으라는 얘기다. 게다가 미국은 자국 기업의 전기차만 지원하는 내용으로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5년까지 5년간 미국에 74억달러(약 8조원)를 투입, 전기차를 현지 생산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국경조정세 압박에 밀려 가전 공장과 자동차 생산라인을 추가한 건 애교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시간을 끌 순 있겠지만 미국 투자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바이든 정부가 내건 정책 로드맵의 종착지는 명확하다. 기술과 산업 패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대국 중국은 물론 우방국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반도체 생산 공정과 고객 정보, 재고량에 이르는 영업기밀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마디로 ‘힘이 있을 때 우리 이익을 지켜내겠다’는 협박이다.

미국 정부의 호출을 받는 기업들은 “우리 정부는 어디에 있느냐”고 되묻는다. 배터리와 전기차, 반도체 모두 현재와 미래의 먹거리이자 국부의 원천이다. 미국에 공장을 짓는 순간 핵심 기술과 인력의 이탈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국을 상대로 시간과의 줄타기를 하는 기업으로선 “업계의 우려를 전달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강 건너 불구경과 다름없다. “이번에도 자구책은 우리 몫이다.” 임기 6개월 남은 정부에 더 기댈 게 있겠느냐는 기업인들의 속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