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기자 ‘말’이 먼저 흔들렸다. 국어학자 주시경이 우리말 사전 편찬에 나선 것은 110년 전인 1911년이었다. 그 사전의 바탕이 된 원고가 ‘말모이’였다. 2019년 개봉된 영화 제목이기도 한 ‘말모이’는 우리말 모음이라는 뜻이다. 주시경은 우리말·글을 살리는 데 앞장서다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미완성의 ‘말모이’는1957년 《우리말 큰사전》으로 완성됐다. 훈민정음 반포 511년 만이었다. 수록 단어는 16만4125개. 이를 토대로 1999년 간행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48만 개, 2008년 개정판에서는 51만 개 단어로 늘었다.

이 과정에는 한글을 빛낸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겨 있다. 소파 방정환 등 아동문학가와 시인·작가·학자, 한글타자기 발명자 공병우, 한글 해외 보급에 나선 미국인 호머 헐버트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최근에는 한글의 우수성과 묘미를 시로 되살리는 작업이 빛을 보고 있다.

내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학회의 국어운동 공로 표창을 받는 문무학 시인은 한글 자모를 집중적으로 다룬 시집 《가나다라마바사》와 《낱말》 《홑》 등을 꾸준히 펴냈다. 한글 자모를 패션이나 디자인, 그림 등에 활용한 사례는 있지만 시로 형상화한 것은 처음이다.

그의 시 ‘겹받침 글자의 풍경 6-ㄼ(넓다/얇다)’을 보자. ‘넓어서 나쁠 것은/없을 것도 같지만/머잖아 너와 내게/재앙으로 올 것 같은/사람과 사람 사이가/너무 넓지 않은가//얇은 건 그 모두가/좋잖을 것 같지만/그 누굴 미워하는 맘/두꺼우면 어쩌니/얇아서 서러울 일이/조금도 없잖은가.’

그는 ‘한글 자모 시로 읽기·4-닿소리 ㄹ’에서 ‘‘ㄹ’/돌고 돌아/흐르는/물길이다/세월도/길도 삶도/‘ㄹ’에/감겨있다/흐르고/또 흐르면서/풀리는 게/삶이다’라며 ‘ㄹ’과 돌고 도는 인생을 겹쳐 보여준다. 시집 《낱말》에 실린 시 ‘애당초 나서는 건 꿈꾸지도 않았다/종의 팔자 타고 나 말고삐만 잡았다/그래도 격이 있나니 내 이름은/격조사.’(‘품사 다시 읽기·2-조사’ 부분)도 기발하다.

더 반가운 것은 그의 시가 영어로 번역돼 해외로 뻗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노래와 영상에 이어 시까지 세계를 주름잡기 시작했으니, 주시경이 생전에 “나라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글”이라고 했던 의미가 한층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