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서원대 교수
김병희 서원대 교수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이란 가정법을 써보면 역사의 이면이 흥미진진해진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역사의 가정법은 만약 히틀러가 미술대학 입시에서 낙방하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세계사도 달라졌으리라는 상상이다.

화가를 꿈꾸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국립미술아카데미 입시에서 두 번이나 낙방했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까? 그가 미대에 입학했더라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의 1년 후배쯤 됐으리라.

에곤 쉴레는 <키스>나 <황금의 여인>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와 친구였으니, 어쩌면 히틀러는 에곤 쉴레와 클림트와 어울리며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표현주의 화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영국 제약회사 레킷벤키저(Reckitt Benckiser)의 인도 뭄바이 지사에서 만든 듀렉스(Durex) 콘돔 광고 ‘독재자들’ 편(2018)에서는 역사의 가정법을 써서 공감을 유도했다.

광고에는 독재자 다섯 명이 등장한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우간다의 이디 아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콩고민주공화국(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그들이다. 증명사진으로 등장하는 다섯 명의 독재자가 유일한 비주얼이다.

헤드라인도 보디카피도 없다. 광고 아래쪽의 듀렉스 로고 밑에 짧은 한 마디가 붙어있을 뿐이다.

“1960년부터 듀렉스 출시. 안타깝게도(unfortunately).” 듀렉스 콘돔은 1960년부터 생산했다. 만약 듀렉스가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난 1889년 이전에 생산됐더라면 히틀러를 비롯한 다른 독재자들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재미있는 발상이다.

듀렉스 콘돔이 독재자들의 탄생보다 훨씬 늦은 1960년부터 출시됐기에 안타깝게도 인류의 역사가 후퇴했다는 것. 진정으로 공감할만한 주장이 아닌가?
듀렉스 콘돔 광고 ‘독재자들’ 편 (2018)
듀렉스 콘돔 광고 ‘독재자들’ 편 (2018)
독재자 5명의 이력을 간략히 살펴보자.

폴 포트(Pol Pot, 1925-1998)는 캄보디아의 노동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공산주의 혁명가였다.

1975년에 론놀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그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정당인 크메르루주 정권의 수반으로서,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약 170만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그는 73세에 고국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생존해있는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은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이디 아민(Idi Amin, 1925-2003)은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1971년에 군사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우간다를 철권 통치하면서 반대파를 대량 학살함으로써 악명을 떨쳤다. 인권단체는 그가 집권한 8년 동안 30-50만명의 국민들이 희생당했다고 추정한다.

반대파의 배신으로 고국에서 추방당한 그는 리비아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해 2003년 8월에 암으로 사망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 성장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 나치당 당수로서 독일 총리직에 오른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히틀러의 광기는 극에 달해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처참하게 학살해 인류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는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의 군인과 정치가이자 대통령이었다.

1965년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는 1997년까지 32년 동안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고를 유용해 수십억 달러의 개인재산을 모았다.

국가 권력을 이용한 그의 국민침탈 행위에 빗대 ‘도둑정치’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다. 1997년 5월, 반군의 무장봉기로 모로코로 망명한 후 같은 해 9월 암으로 사망했다.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al-Qaddafi, 1942-2011)는 1969년에 친 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리비아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1977년에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인민의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헌법을 폐기하고 42년간 전제 권력을 휘둘렀다.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시위로 2011년에 시민군의 손에 고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광고주는 인쇄 광고와 유튜브의 동영상 광고를 동시에 내보냈다. 가정법으로 희대의 독재자들을 소환함으로써 콘돔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공감성(Empathy)이다. 공감성이란 다른 사람의 상태, 상황, 의견, 주장에 대해 본인도 동의한다고 느끼는 성향이다.

여기에서는 광고 주장에 동의하는 공감성이다. 광고를 보면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독재자의 말로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독재자의 아버지가 그때 콘돔을 썼더라면 그들은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인류사의 비극도 없었으리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설득을 시도하는 광고에 사람들은 공감한다. 경영자의 말이나 글에서도 구체적이고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며 공감을 유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경영자의 말이 상황이나 여건에 맞지 않아 ‘갑분싸’(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다는 젊은이들의 신조어)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윗사람 앞이니까 그냥 들어주는 척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뿐이겠는가? 학교에서, 병원에서, 공공기관에서, 각종 일터에서, 갑분싸하게 만들어버리는 직장 상사들이 많다.

그들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하다. 정치인도 공감을 얻으려면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

공감을 얻지 못하면 마음은 달아난다. 우리네 일상생활에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구체적인 대화가 오가야 한다. 그래야 서로의 마음이 움직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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