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 변전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정전된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8월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 변전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정전된 모습. 사진=연합뉴스
내년부터 구축 아파트에도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 개정이 이뤄진 가운데 대규모 정전 사고가 급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자동차연구원(한자연)이 12일 발표한 '전기차 충전인프라 확대에 따른 공동주택 전력설비 개선 필요성' 보고서를 보면, 정부의 제4차 친환경자동차 기본계획대로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의무화할 경우 전력 사용량을 감당 못해 정전이 발생하는 아파트 단지가 속출할 전망이다.

정부는 4차 친환경자동차 기본계획에서 전기차 충전시설 의무설치 비율을 끌어올렸다. 이를 위해 산업부가 입법예고한 친환경자동차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에 따르면, 기존에는 신축 아파트에만 부과되던 전기차 충전기 설치 의무가 구축 아파트로도 확대됐다. 신축 아파트는 전기차 충전기를 기존 총 주차면 수의 0.5% 비율에서 5%로 늘려야 하고 구축 아파트 역시 2% 이상에 전기차 충전기를 갖춰야 한다.

한자연은 1990년대 시공된 아파트의 경우 기존 설비로는 전기차 충전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1990년대 아파트의 세대별 전력사용 설계용량은 가구당 1kW였지만, 현재는 전자기기 사용이 늘어나면서 세대당 3~5kW의 전력을 사용해 이미 큰 부하를 겪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 정전 사태 방지를 위한 에어컨 홀·짝제 운동 공고문이 부착돼 있다. 사진=뉴스1
서울의 한 아파트에 정전 사태 방지를 위한 에어컨 홀·짝제 운동 공고문이 부착돼 있다. 사진=뉴스1
게다가 준공 30년차 이상 노후 아파트도 꾸준히 증가세에 있다. 통계청의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준공 20년을 넘긴 서울 지역 아파트 세대수는 82만7978가구에 달한다. 2020년 기준 서울 내 전체 아파트 가구 수가 177만2670가구인 점을 고려하면 절반에 가까운 46.7%가 20년 이상 노후 아파트인 셈이다. 준공 30년을 넘긴 아파트도 17.3%(30만7366가구)에 달했다.

경기도 역시 1990년대 입주한 분당·평촌·일산 등 1기 신도시가 30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2015년 경기도에서 준공 30년을 넘긴 아파트는 총 5만9990가구(2.4%)였지만 2020년에는 16만5898가구(5.3%)로 3배 가까이 늘었다. 20년 이상 된 아파트도 전체의 34.9%를 차지했다.

노후 아파트가 늘면서 여름철 정전 사고도 증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전기안전공사와 합동으로 아파트에서 발생한 정전 사고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7~8월 133건이던에서 올해 7~8월엔 221건으로 늘었다. 여름철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면 변압기가 버티지 못해 정전이 발생하는 처지다.

때문에 "(노후 아파트에선) 에어컨도 마음대로 못 쓴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전기차 충전기 설치도 의무화되면 이같은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단 얘기다.
주택의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는 시간과 전기차 충전이 증가하는 시간이 겹친다. 사진=한자연
주택의 전력 사용량이 증가하는 시간과 전기차 충전이 증가하는 시간이 겹친다. 사진=한자연
한자연은 "아파트 주차관제시스템을 통해 차량 입고 현황을 분석한 결과 오후 5시 이후 차량 입고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전기차의 주거용 전력 충전패턴은 주택용 전력소비패턴과 유사하다. 저녁 시간대 주택용 전력부하가 가중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아파트 변압기 교체가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아파트 변압기 교체는 입주자대표위원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 교체 비용은 아파트 관리비로 부과된다. 한국전력이 노후 변압기 교체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아파트 단지에서 비용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

한자연은 "전체 자동차 대비 전기차 비율은 1% 미만"이라며 "변압기 교체 비용은 내연기관 자동차 차주도 부담해야 해 입주민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공동주택 전력설비 교체·증설 지원정책 초점을 전기차 충전인프라를 수용할 수 있는 전체적인 '능력' 중심으로 전환하고, 필요시 공동주택 거주자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