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 사계절 창작 과정 촬영…詩가 된 영화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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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영화제 주목 '시인들의 창'
2년간 '문학의 집'서 동고동락
시인·작가들 사색과 고뇌 담아
대사 한마디 없는 롱테이크 샷
잣나무숲 산책길에 흐르는 시
눈보라 장면 등 영상미 압권
선댄스 등 해외영화제도 '손짓'
고두현 논설위원
2년간 '문학의 집'서 동고동락
시인·작가들 사색과 고뇌 담아
대사 한마디 없는 롱테이크 샷
잣나무숲 산책길에 흐르는 시
눈보라 장면 등 영상미 압권
선댄스 등 해외영화제도 '손짓'
고두현 논설위원
15일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숨은 화제작’은 70분짜리 문학예술다큐영화 ‘시인들의 창’이었다.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전한 감독이 강원 횡성 ‘예버덩문학의집’에서 2년간 문인들의 창작 과정을 계절별로 담아낸 작품이다.
배우 대신 문인이 출연하고 대사 한마디 없는데도 예매 시작과 동시에 표가 매진됐다. 지난 10, 11, 14일 부산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는 동안 “영화 전체가 한 편의 시”라는 호평이 이어졌고, 선댄스 등 해외 영화제 출품 요청도 줄을 이었다.
영화는 ‘이곳은 시인 작가들이 머물다 가는 문학의 집이다’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첫 장면은 문학의 집으로 향하는 이명훈 작가의 뒷모습. 바람 소리와 물소리 속으로 작은 다리를 지나 도착하면 이곳 주인인 조명 시인이 야외 식탁에 테이블보를 깔고 있다.
집필실 책상 앞에는 가로로 길게 난 창문이 보인다. 이곳에 앉아 오래도록 창밖을 응시하다 밤새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작가. 적막 속에 글자 찍히는 소리만 들리는 방 안으로 환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또 낮과 밤이 그렇게 바뀐다.
이 대목에서 가장 느리고 고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잣나무 사이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사색하며 걷는 한 시인의 옆모습. 그가 나무 사이를 거니는 동안 배경음악처럼 김상미 시인의 시 ‘문학이라는 팔자’가 낭송으로 흐른다.
‘어느 날,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시를 자신에게서 산 채로 잘라내 버렸다. 로베르트 발저는 스스로 헤리자우의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27년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죽을 때까지 종이봉투만 접었다. (…) //그들은 모두 내가 사랑한 문학,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문학, 세사르 바예호의 시구처럼 ‘신(神)이 아픈 날 태어난’ 팔자들이다.’
‘언어의 감옥’에서는 시가 써지지 않아 원고지를 불에 태우는 시인들의 비장한 모습이 보이고, ‘언어의 도단’에선 ‘일상의 꿈마저 버리라’는 금몽암(禁夢庵)의 경구가 화면에 겹쳐진다.
마지막 ‘언어의 먼 길’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눈보라 장면이 나온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밭 한가운데 100년 넘은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점점 거세지는 돌개바람과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해일처럼 일어나는 눈 폭풍…. 그 아래 까만 외투를 입은 조명 시인이 나무 밑동을 어루만지며 맴도는 모습이 압권이다.
관객들도 이 장면과 잣나무 산책길에 흐르는 시 낭송, 밤새 쓴 글을 지우고 육필 원고까지 불태우는 순간을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꼽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컷은 150여 개밖에 안 된다. 극영화가 1500~3000컷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느리고도 느리다. 인위적인 연출 없이 롱테이크로 잡은 고요와 적요의 그 순간들이 관객을 사색과 성찰의 세계로 인도한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다음날도 그랬다. 김 감독은 “문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 내면을 카메라 움직임 없이 ‘거리 두기’로 찍으려 했다”며 “시간·공간·인간이라는 세 칸(間)의 ‘아름다운 간격’을 영상으로 모두 담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명 시인은 “몇 번이나 코끝이 찡했다”며 “함께하기로 했던 신경림 시인께서 건강 때문에 동참할 수 없어 안타까운데, 문학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낸 이 작품을 보면 선생님도 대견해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명훈 작가는 “오랫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이번 작업과 함께 치유됐다”며 고마워했다.
부산의 ‘문화예술공간 빈빈’ 대표인 김종희 관장은 “감독의 의도인 ‘무용지용(無用之用:무용하다고 보이는 것이 실은 유용하다)’과 함께 ‘술이부작(述而不作: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의 의미가 참으로 뜻깊게 다가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인들의 창’처럼 순수 문인들의 창작 공간을 사계절에 담은 문학다큐영화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만큼 해외영화제의 관심이 높다. 이에 출연 문인들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 순서에 따라 장르별로 정리해 기록한다.
가장 많이 등장한 이명훈·구지원 작가를 비롯해 시인 조명 나병춘 석미화 고두현 홍일표 천수호 남궁선 염창권, 작가 박명순 최창근 김용안 김세인 김전한 손병현 김기환 김상진 천상범 김호연 장성욱 최현우 등 22명이다. 김상미 시인의 시를 낭송한 정겨운 시인은 목소리로 출연했다.
배우 대신 문인이 출연하고 대사 한마디 없는데도 예매 시작과 동시에 표가 매진됐다. 지난 10, 11, 14일 부산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는 동안 “영화 전체가 한 편의 시”라는 호평이 이어졌고, 선댄스 등 해외 영화제 출품 요청도 줄을 이었다.
영화는 ‘이곳은 시인 작가들이 머물다 가는 문학의 집이다’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첫 장면은 문학의 집으로 향하는 이명훈 작가의 뒷모습. 바람 소리와 물소리 속으로 작은 다리를 지나 도착하면 이곳 주인인 조명 시인이 야외 식탁에 테이블보를 깔고 있다.
집필실 책상 앞에는 가로로 길게 난 창문이 보인다. 이곳에 앉아 오래도록 창밖을 응시하다 밤새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작가. 적막 속에 글자 찍히는 소리만 들리는 방 안으로 환하게 아침이 밝아오고 또 낮과 밤이 그렇게 바뀐다.
"사색과 성찰의 영상시학" 호평
‘언어의 사찰’ 편에서는 자욱한 안개와 강물, 새소리, 태풍에 휘청거리는 자작나무, 빗속을 맨발로 걷는 작가의 뒷모습이 펼쳐진다. 그 사이로 마당의 커다란 뽕나무 잎이 가을 햇살에 익어가고….이 대목에서 가장 느리고 고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잣나무 사이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사색하며 걷는 한 시인의 옆모습. 그가 나무 사이를 거니는 동안 배경음악처럼 김상미 시인의 시 ‘문학이라는 팔자’가 낭송으로 흐른다.
‘어느 날,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시를 자신에게서 산 채로 잘라내 버렸다. 로베르트 발저는 스스로 헤리자우의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27년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죽을 때까지 종이봉투만 접었다. (…) //그들은 모두 내가 사랑한 문학,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문학, 세사르 바예호의 시구처럼 ‘신(神)이 아픈 날 태어난’ 팔자들이다.’
‘언어의 감옥’에서는 시가 써지지 않아 원고지를 불에 태우는 시인들의 비장한 모습이 보이고, ‘언어의 도단’에선 ‘일상의 꿈마저 버리라’는 금몽암(禁夢庵)의 경구가 화면에 겹쳐진다.
마지막 ‘언어의 먼 길’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눈보라 장면이 나온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밭 한가운데 100년 넘은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점점 거세지는 돌개바람과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해일처럼 일어나는 눈 폭풍…. 그 아래 까만 외투를 입은 조명 시인이 나무 밑동을 어루만지며 맴도는 모습이 압권이다.
관객들도 이 장면과 잣나무 산책길에 흐르는 시 낭송, 밤새 쓴 글을 지우고 육필 원고까지 불태우는 순간을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꼽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컷은 150여 개밖에 안 된다. 극영화가 1500~3000컷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느리고도 느리다. 인위적인 연출 없이 롱테이크로 잡은 고요와 적요의 그 순간들이 관객을 사색과 성찰의 세계로 인도한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다음날도 그랬다. 김 감독은 “문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 내면을 카메라 움직임 없이 ‘거리 두기’로 찍으려 했다”며 “시간·공간·인간이라는 세 칸(間)의 ‘아름다운 간격’을 영상으로 모두 담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명 시인은 “몇 번이나 코끝이 찡했다”며 “함께하기로 했던 신경림 시인께서 건강 때문에 동참할 수 없어 안타까운데, 문학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낸 이 작품을 보면 선생님도 대견해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명훈 작가는 “오랫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이번 작업과 함께 치유됐다”며 고마워했다.
부산의 ‘문화예술공간 빈빈’ 대표인 김종희 관장은 “감독의 의도인 ‘무용지용(無用之用:무용하다고 보이는 것이 실은 유용하다)’과 함께 ‘술이부작(述而不作: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의 의미가 참으로 뜻깊게 다가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인들의 창’처럼 순수 문인들의 창작 공간을 사계절에 담은 문학다큐영화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만큼 해외영화제의 관심이 높다. 이에 출연 문인들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 순서에 따라 장르별로 정리해 기록한다.
가장 많이 등장한 이명훈·구지원 작가를 비롯해 시인 조명 나병춘 석미화 고두현 홍일표 천수호 남궁선 염창권, 작가 박명순 최창근 김용안 김세인 김전한 손병현 김기환 김상진 천상범 김호연 장성욱 최현우 등 22명이다. 김상미 시인의 시를 낭송한 정겨운 시인은 목소리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