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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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

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챙겼다. 실제로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금나라 병사들은 자신들의 친인척, 이웃을 방패로 앞세워 밀고 오는 몽골군에게 차마 대항을 못하다가 괴멸되기도 했다. 이어 부하라는 당시 몽골군의 약탈에 내맡겨졌고 불에 타서 도시 자체가 파괴돼버렸다. 도시의 약탈은 몽골군의 정식 수입 수단이기도 했다.

몽골군은 정복한 국가의 인재를 활용하는 데서도 뛰어났다. 중국인과 무슬림 출신 공성전 전문가를 대동한 몽골군은 호레즘 샤의 예상과 달리 ‘성을 무너뜨리는 법’에도 능통했다. 부하라 주민들에 대한 처리는 일종의 본보기였다. 완강하게 저항해 몽골군에게 피해를 입힌 도시는 함락된 뒤 주민들이 학살되는 대가를 치렀다. (농사를 짓고 사는) 정주민을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는 존재”로 인식했던 몽골군으로선 정주민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 윤리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몽골군은 좋게 말하면 사고가 유연했다. 같은 유목제국이었던 여진족의 금나라만 하더라도 12세기 후반 몽골군의 참략에 시달리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조정이 오행의 순환이론에 따른 정통성 논쟁에 빠져 있을 정도로 ‘한화(漢化: 중국에 동화)’가 진행됐지만 몽골족은 달랐다. 무의미한 관념론 논쟁에 빠지면서 대응 기회를 놓쳤던 금과 달리 칭기즈칸 휘하 맹장인 제베와 수부타이가 오늘날의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을 때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을 활용해 방패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놓고 싸울 정도였다. 결국 이 같은 몽골군과 직면한 호레즘은 속수무책이었다. 코끼리부대를 포함해 호레즘의 정예 엘리트 군단이 지키고 있던 사마르칸트 역시 부하라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사마르칸트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의미한 항전을 포기했고 며칠 만에 성문을 열었다. 몽골군은 자발적으로 항복한 5만 명의 시민을 학살하지는 않았지만 “말과 사람(발)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사마르칸트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20만디나르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휘하에 있으면서 몽골에 항복한 시민들은 도시 밖으로 보내졌고, 도시에선 약탈이 자행됐다. 1221년에는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총 10만 명의 장인들이 몽골과 중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역참 설치로 동서 간 교류 확대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순간을 동서제국의 인적 교류가 활성화된 때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몽골제국은 복속국에 빼놓지 않고 역참 설치를 강요했다. 고려와 러시아, 베트남 등 간접적인 지배를 받은 나라도 모두 역참을 설치할 것을 요구받았고,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신속한 정보 전달과 교류가 가능했다. 당시 중국에서 차출된 공성전문가와 농부들이 아제르바이잔이나 메르브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의사와 천문 관측사, 통역사, 기술자, 심지어 요리사도 동서제국 간에 교환됐다. 이슬람권에서 발달한 의학과 천문학, 지리학 관련 지식은 이들을 통해 동방에 전수됐다.

또 몽골인들의 중국 지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란 뜻의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인 ‘색목인’이라고 불린 티베트, 위구르, 킵차크, 캉글리, 알란인과 이란 아랍 계통의 무슬림이 동원됐다. 킵차크와 알란, 캉글리 출신들은 주로 군사 분야에 동원됐고 위구르인은 재정과 행정 분야에, 티베트인은 불교 분야에 주로 배치됐다. 좀 더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서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훌레구에게 몽골의 대칸이었던 묑케가 몽골 최고의 레슬링 선수를 빌려줘 지역 장사와 대결하게 한 사례도 있다. 원나라 시대에는 하늘의 뜻을 읽기 위한 두 번째 의견(더블 체크)을 얻기 위해 페르시아 점성술사(천문관)가 중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도시를 점령한 뒤 약탈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 밖으로 불러낼 필요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은 몽골 팽창 기간 내내 계속 이어졌다. 도시를 파괴하는 방식도 옥수스강의 둑을 무너뜨려 도시 전체를 완전히 박살낸 우르겐치처럼 다양화돼 갔다. 무력시위를 기반으로 한 몽골식 강제 인적 교류와 확장은 몽골제국이 틀을 잡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278~1290년대 초까지 원 제국은 직접적인 지배 지역으로 보기 힘들었던 미얀마와 베트남, 인도 바아바르와 코람, 샴, 자바, 류큐 등 동남아 여러 지역을 적극적으로 교역권으로 합류시켰다. 1279년 원 세조 쿠빌라이는 해외 여러 나라를 초유(招諭·불러서 타이름)하라고 지시했고, 같은 달 국내외 여러 군주에게 이 같은 내용의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1282년 정월을 기해서는 선박 100척과 군사 및 사공 1만 명을 동원해 해외 여러 지역을 원정하게 했다. 그리고 이 같은 원정은 1280년대 내내 계속됐다. 육상 기마전뿐 아니라 대규모 선단을 동원해 교역의 물꼬를 튼 셈이다. 그리고 강제적인 인적 교류이긴 하지만 몽골 지배 아래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가 첫발을 내디디게 됐다.

NIE 포인트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① 세계화와 교류 확대가 성장과 발전을 한층 강화하는 이유는 왜일까.

② 당나라 때도 로마와 교류하는 등 동서 교류가 있었지만 몽골 시대가 세계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③ 한때 동유럽과 러시아까지 지배했던 몽골이 지금처럼 쇠퇴한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