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면역학 강의] 우주 밖 물질에도 반응할 ‘후천성 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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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승우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
1950~60년대, 생물학이 세포와 이를 구성하는 미시적인 분자의 수준으로 탐구의 영역을 좁혀가자 오히려 생명에 관한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려갔다. DNA 이중나선 구조가 제시된 1953년 이후, ‘유전자는 단백질로 번역된다’는 소위 생명의 중심 도그마(이론)가 과학으로 증명됐다.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은 대부분 단백질이 수행하지만, 단백질의 정보는 DNA에 적혀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 활동은 단백질 정보를 코딩한 DNA의 구성으로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생물학이 생명의 근원에 다가서고 있을 무렵, 후천성 면역반응에 관여하는 항체(抗體·antibody)라는 단백질의 신비함은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항체라는 단백질의 미스터리
코로나19 백신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맞은 지금, 백신 접종으로 만들어져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중화항체는 온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대명사가 됐다.
외부의 비자기 단백질(예컨대 코로나19 백신)이 체내로 주입됐을 때, 이를 인식하는 항체가 만들어진다. 항체가 과학적으로 연구될 무렵,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주입하는 단백질의 사소한 부분만 바뀌어도 그 변형을 인식하는 새로운 항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즉 A라는 단백질의 표면에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세한 화학 분자(이를 ‘합텐(hapten)’이라고 부른다)를 붙여 A’ 형태로 주입하면, 원래 단백질인 A와 변형된 A’를 별도로 인식하는 항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들은 ‘항체가 기존에 있던 비자기 분자들을 인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던 새로운 분자들, 나아가 앞으로 등장할 미지의 분자들까지도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수수께끼를 학계에 던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명망 높은 학자들이 가설을 제안했다.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지시 가설(instruction theory)’을 제안했다. 항체라는 단백질은 놀라운 변신 능력이 있어서 주어진 외부물질에 알맞도록 스스로 모양을 바꾼 다음 그것에 달라붙어 작용한다는 가설이다.
즉 하나의 항체가 다양한 물질에 맞게 구조가 변하므로 인간이 지닌 항체의 종류가 제한적이라도 충분히 무한대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단백질 생화학 지식이 발전하면서 항체는 폴링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성립되기 어려웠다.
물리학과 의학을 공부한 닐스 예르네는 1953년 항체의 다양성에 대한 참신한 이론을 주장한다. 감염균(비자기 물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항체가 만들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특정 비자기 분자에만 인식해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 가설(selection theory)’ 은 당시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 데 실패했다. 인간의 몸에 모든 물질에 반응할 수 있는 거대한 항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명의 중심 도그마에 따른다면,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는 제한적인데 그 대부분을 항체 만드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후천성 면역의 중심 이론, 클론 선택
자칫 사장될 뻔했던 선택 가설은 1957년 면역학의 위대한 사상가로 칭송되는 의과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닛에 의해 더 합리적인 가설로 재탄생된다. 폴링과 예르네의 이론이 항체라는 단백질에만 국한했다면, 버닛은 항체를 생산하는 세포로 관점을 확장한 것이다(지금은 우리가 항체를 만드는 세포가 B림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항체를 만드는 세포는 하나의 특정한 항체를 만든다. 면역세포들이 만드는 항체의 레퍼토리를 모두 합하면 10억 개에 해당하며, 각 항체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지녔다. 특정 비자기 분자(항원)가 인체에 침입할 경우, 이에 알맞은 항체를 만들 수 있는 세포가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하나의 면역세포가 항원을 만날 경우 여러 개의 클론으로 분열하고 이들은 항체를 대량생산해 위험한 분자를 중화시킨다’.
버닛은 다윈의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세포에 적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같은 ‘클론 선택(clonal selection)’ 이론을 제안한 것이다. 버닛의 클론 선택 이론은 불멸의 과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1900년에 제안한 ‘사이드체인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를리히는 항체가 디프테리아균 독소에 대한 특이적인 저항 능력을 지닌다는 점을 비유해 ‘마법의 탄환 (magic bullet)’이라 지칭한 학자다. 에를리히는 하나의 면역세포가 다양한 사이드체인(지 금의 개념으로는 수용체)을 표면에 갖고 있다고 가정했다. 세균의 독소와 같은 항원이 주어지면 사이드체인 중 결합력이 높은 것이 반응하고, 이후 세포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를리히, 예르네, 버닛의 위대한 점은 이 모든 가설을 현대 생명과학이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전에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 올바른 원리를 예측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예측은 옳았고, 이론은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되면서 현대면역학, 특히 후천성 면역반응의 절대적인 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세 학자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글에서 선천성 면역반응은 감염균의 자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명확한 형태에 반응한다고 했다. 후천성 면역은 그러한 형태가 없어졌을 때 면역체계는 어떻게 비자기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예를 들어보자. 세균들이 우리 몸 안으로 침입했고, 일부 균이 선천성 면역으로 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세균은 생명의 주어진 본능에 따라 대사하고 증식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형태는 희미해지고 핵산이나 단백질과 같은 고분자 유기물로 해체 혹은 재결합하는 과정을 겪는다.
생명이 유기물질의 수준으로 해체된 경우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우리 몸 안의 단백질이나 감염균의 단백질이나 아미노산의 서열만 일부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속성을 가진 물질이다.
더 어려운 점은 우리 면역체계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감염균을 마주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세균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고, 바이러스는 셀 수조차 없다. 우리가 2년 전만 해도 코로나19를 만날 것이라 누가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생존을 위해 후천성 면역체계는 미지의 감염균 분자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지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면역체계는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것인가. 항체와 같이 단순한 화학 분자 간 결합력에 의해 반응성을 나타내는 후천성 면역물질이 개체가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만 가지의 단백질을 자기와 비자기로 구분해서 작동하려면 도대체 어떤 묘안을 마련해야 할 것인가. 애당초 이게 가능한 일일까.
클론 다양성의 비밀
B세포의 수용체인 항체와 T세포의 수용체 같은 후천성 면역반응을 구성하는 면역세포의 수용체들은 가능한 모든 유기물(특히 단백질)에 반응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를 위해 최대한 많은 레퍼토리의 후천성 면역 수용체를 만들었다.
그 방식도 철저히 무작위적(stochastic)이다. 즉 후천성 면역 수용체들은 반응할 대상을 미리 규정하지 않고 무조건 많은 종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생물들에 대비하기 위해 후천성 수용체의 가짓수는 얼마가 적당할까. 친숙한 데이터의 단위로 기가(109), 테라(1012), 페타(1015), 아니면 엑사(1018)? 일단 가짓수가 많으면 처음 보는 감염균에도 대항할 확률이 높아질 테니 다다익선 아닐까. 적당히 중간 정도인 테라의 가짓수가 좋겠다고 가정해도, 또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이 코딩하는 유전자 개수를 최대 2만5000개 정도로 예상했다(물 론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항체를 비롯해 모든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는 태어나면서 부모님께 물려받아 이미 정해져 있다. 테라 가짓수의 항체 단백질을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 유전자의 전부가 항체를 코딩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사의한 항체 레퍼토리의 비밀은 1980년대 초 일본인 과학자 도네가와 스스무에 의해 밝혀진다. 항체 단백질의 구조는 기본 뼈대를 만드는 불변 부위(constant region)와 항원에 결합하는 가변 부위(variable region)로 구분할 수 있다. 항체의 다양성은 항원에 반응하는 가변 부위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도네가와의 발견은 가변 부위를 구성하는 유전자가 분절 (segmented)된 조각 유전자들의 조합으로 구성됨을 증명한 것이다. 블록 장난감 혹은 퀼트를 생각하면 쉽다.
조금 자세히 들어가자. 항체의 가변 부위는 V, D, J라는 분절된 유전자들이 V-D-J 순으로 이어져 만들어진다. 하지만 V, D, J를 코딩하는 유전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V분절은 조금씩 다른 아미노산 서열을 갖는 1번부터 40번까지 클러스터로 존재한다. D분절은 23개고, J분절은 6개다. 특정 항체의 항원에 반응하는 가변 부위는 V-D-J 분절들의 랜덤한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가변 부위는 V 10 - D7- J 1번이 모이고, 어떤 부위는 V7-D13-J5번이 만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항체의 뼈대는 같더라도 항원에 결합하는 가변 부위만 달라짐으로써 항체들이 항원에 특이적인 결합력을 가진 개별적인 수용체로 만들어진다. 다른 모양의 나사를 풀기 위해 드라이버 본체에 다른 노즐을 갈아끼우는 것에 비유해본다.
유전자 분절들의 재조합이 생식 세포가 아니라 체세포인 B림프구에서 일어나므로 학문적으로는 ‘체세포 재조합(somatic recombination)’이라고 부른다. 항체는 크기가 작고 가벼운 L사슬(light chain)과 무거운 H사슬(heavy chain)이 쌍으로 결합한 구조다.
각 사슬의 가변 부위는 각각의 재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인간 항체의 가짓수는 V, D, J 각 분절을 선택할 경우의 수를 곱한 1013개다.
다른 대표적 후천성 면역 수용체인 T세포 수용체(TCR·T Cell Receptor)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가능한 가짓수는 무려 1018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후천성 면역세포들은 재조합을 통해 오직 하나의 수용체만 만든다는 데 있다.
수용체 유전자가 재조합되면 염색체 상에서 더 이상 변형되지 않는 형태로 고정돼 그 형태로 딸세포가 물려받는다. 면역학자들은 이들을 ‘클론’이라고 부른다.
후천성 면역체계는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지 않다. 식물은 후천성 면역이 없고 선천성 면역체계만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구 동물의 96% 이상은 선천성 면역만으로 별일 없이 산다.
동물의 진화를 추적하면, 인간과 유사한 후천성 면역체계는 턱과 이빨이 있는 상어와 같은 어류부터 발견된다. 여전히 왜 동물 진화의 특정 시기부터 후천성 면역이 발생했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선천성 면역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면역체계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후천성 면역체계의 상징은 위에서 언급한 유전자 재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재조합 활성화 유전자(RAG·RecombinationActivating Gene)’라는 단백질이다. RAG 단백질은 후천성 면역 수용체의 가변 부위 DNA에서 특정 분절을 찾아 구부리고, 자르고, 다른 분절과 이어 붙이는 식으로 염색체 (chromosome)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전자 분절들을 재조합해 가변 부위를 만든다. 바로 이 RAG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가 상어로 대표되는 무악류부터 나타난다. 후천성 면역의 특징
정리해보면, 후천성 면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후천성 면역은 비자기 물질에 반응할 수 있는 항체와 같은 ‘면역 수용체 풀(pool)’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비자기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만드는 것은 선천성 면역도 마찬가지이지만, 후천성 면역은 유전자 재조합을 통해 무작위적으로 광대한 레퍼토리의 수용체를 만든다.
또한, 각 면역세포가 개별 수용체 하나만을 가진 클론들로 존재하고 후천성 면역체계는 개별적인 클론들의 집단으로 유지된다. 클론 집단 전체의 수는 거대하지만, 개별적인 클론의 수는 최소로 유지함으로써 다양성을 유지한다. 감염균과 같은 항원을 만나면 다양한 클론들 중 항원에 친화력 이 높은 수용체를 가진 클론들이 반응한다.
이처럼 후천성 면역체계는 일단 만들어놓고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시스템이어서 ‘예기적 시스템(anticipatory system)’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 조각들을 주형으로 사용하지만, 무작위적인 재조합으로 후천성 수용체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특정 항원에 반응하는 수용체는 단백질 서열 상 똑같지 않을 확률이 높다.
즉 개개인이 특정 항원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백신과 같이 항원을 주입하면 대부분은 높은 친화력을 가진 항체를 생성한다. 면역세포 클론들 사이에서 적합한 클론이 결정되면, 버닛이 65년 전에 예측한 대로 클론 선택 과정을 통해 특정 클론이 압도적으로 수를 늘린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의도된 오류를 면역 수용체 유전자에 허용함으로써 하위 클론들을 만들어내고, 항원에 친화력이 가장 좋은 새로운 클론들을 탄생시킨다. 이 놀라운 자연 선택 과정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후천성 면역을 왜 영어로 ‘adaptive’ 혹은 ‘acquired immunity’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후천성 면역이 우주 밖 물질에도 반응할 태세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정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작위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한 후천성 면역(항체)은 어떻게 자기 세포나 조직을 공격하지 않는가’다.
*일부 글은 대니얼 데이비스의 <나만의 유전자>를 참고함.
<저자 소개>
이승우
바이러스면역학을 전공하고 포스텍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샌디에이고 라호야면역학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2012년부터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포면역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초연구로는 점막기관 염증 및 감염 면역을, 응용연구로는 항암면역치료를 연구 중이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은 대부분 단백질이 수행하지만, 단백질의 정보는 DNA에 적혀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 활동은 단백질 정보를 코딩한 DNA의 구성으로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생물학이 생명의 근원에 다가서고 있을 무렵, 후천성 면역반응에 관여하는 항체(抗體·antibody)라는 단백질의 신비함은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항체라는 단백질의 미스터리
코로나19 백신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맞은 지금, 백신 접종으로 만들어져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중화항체는 온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대명사가 됐다.
외부의 비자기 단백질(예컨대 코로나19 백신)이 체내로 주입됐을 때, 이를 인식하는 항체가 만들어진다. 항체가 과학적으로 연구될 무렵,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주입하는 단백질의 사소한 부분만 바뀌어도 그 변형을 인식하는 새로운 항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즉 A라는 단백질의 표면에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세한 화학 분자(이를 ‘합텐(hapten)’이라고 부른다)를 붙여 A’ 형태로 주입하면, 원래 단백질인 A와 변형된 A’를 별도로 인식하는 항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들은 ‘항체가 기존에 있던 비자기 분자들을 인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던 새로운 분자들, 나아가 앞으로 등장할 미지의 분자들까지도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수수께끼를 학계에 던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명망 높은 학자들이 가설을 제안했다.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지시 가설(instruction theory)’을 제안했다. 항체라는 단백질은 놀라운 변신 능력이 있어서 주어진 외부물질에 알맞도록 스스로 모양을 바꾼 다음 그것에 달라붙어 작용한다는 가설이다.
즉 하나의 항체가 다양한 물질에 맞게 구조가 변하므로 인간이 지닌 항체의 종류가 제한적이라도 충분히 무한대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단백질 생화학 지식이 발전하면서 항체는 폴링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성립되기 어려웠다.
물리학과 의학을 공부한 닐스 예르네는 1953년 항체의 다양성에 대한 참신한 이론을 주장한다. 감염균(비자기 물질)을 만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항체가 만들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특정 비자기 분자에만 인식해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 가설(selection theory)’ 은 당시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 데 실패했다. 인간의 몸에 모든 물질에 반응할 수 있는 거대한 항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명의 중심 도그마에 따른다면,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는 제한적인데 그 대부분을 항체 만드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후천성 면역의 중심 이론, 클론 선택
자칫 사장될 뻔했던 선택 가설은 1957년 면역학의 위대한 사상가로 칭송되는 의과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닛에 의해 더 합리적인 가설로 재탄생된다. 폴링과 예르네의 이론이 항체라는 단백질에만 국한했다면, 버닛은 항체를 생산하는 세포로 관점을 확장한 것이다(지금은 우리가 항체를 만드는 세포가 B림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항체를 만드는 세포는 하나의 특정한 항체를 만든다. 면역세포들이 만드는 항체의 레퍼토리를 모두 합하면 10억 개에 해당하며, 각 항체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지녔다. 특정 비자기 분자(항원)가 인체에 침입할 경우, 이에 알맞은 항체를 만들 수 있는 세포가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
하나의 면역세포가 항원을 만날 경우 여러 개의 클론으로 분열하고 이들은 항체를 대량생산해 위험한 분자를 중화시킨다’.
버닛은 다윈의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세포에 적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같은 ‘클론 선택(clonal selection)’ 이론을 제안한 것이다. 버닛의 클론 선택 이론은 불멸의 과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1900년에 제안한 ‘사이드체인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에를리히는 항체가 디프테리아균 독소에 대한 특이적인 저항 능력을 지닌다는 점을 비유해 ‘마법의 탄환 (magic bullet)’이라 지칭한 학자다. 에를리히는 하나의 면역세포가 다양한 사이드체인(지 금의 개념으로는 수용체)을 표면에 갖고 있다고 가정했다. 세균의 독소와 같은 항원이 주어지면 사이드체인 중 결합력이 높은 것이 반응하고, 이후 세포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를리히, 예르네, 버닛의 위대한 점은 이 모든 가설을 현대 생명과학이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전에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 올바른 원리를 예측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예측은 옳았고, 이론은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증명되면서 현대면역학, 특히 후천성 면역반응의 절대적인 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세 학자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지난 글에서 선천성 면역반응은 감염균의 자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명확한 형태에 반응한다고 했다. 후천성 면역은 그러한 형태가 없어졌을 때 면역체계는 어떻게 비자기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예를 들어보자. 세균들이 우리 몸 안으로 침입했고, 일부 균이 선천성 면역으로 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세균은 생명의 주어진 본능에 따라 대사하고 증식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형태는 희미해지고 핵산이나 단백질과 같은 고분자 유기물로 해체 혹은 재결합하는 과정을 겪는다.
생명이 유기물질의 수준으로 해체된 경우엔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우리 몸 안의 단백질이나 감염균의 단백질이나 아미노산의 서열만 일부 다를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속성을 가진 물질이다.
더 어려운 점은 우리 면역체계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감염균을 마주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세균은 밤하늘의 별만큼 많고, 바이러스는 셀 수조차 없다. 우리가 2년 전만 해도 코로나19를 만날 것이라 누가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생존을 위해 후천성 면역체계는 미지의 감염균 분자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를 지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면역체계는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것인가. 항체와 같이 단순한 화학 분자 간 결합력에 의해 반응성을 나타내는 후천성 면역물질이 개체가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만 가지의 단백질을 자기와 비자기로 구분해서 작동하려면 도대체 어떤 묘안을 마련해야 할 것인가. 애당초 이게 가능한 일일까.
클론 다양성의 비밀
B세포의 수용체인 항체와 T세포의 수용체 같은 후천성 면역반응을 구성하는 면역세포의 수용체들은 가능한 모든 유기물(특히 단백질)에 반응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를 위해 최대한 많은 레퍼토리의 후천성 면역 수용체를 만들었다.
그 방식도 철저히 무작위적(stochastic)이다. 즉 후천성 면역 수용체들은 반응할 대상을 미리 규정하지 않고 무조건 많은 종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생물들에 대비하기 위해 후천성 수용체의 가짓수는 얼마가 적당할까. 친숙한 데이터의 단위로 기가(109), 테라(1012), 페타(1015), 아니면 엑사(1018)? 일단 가짓수가 많으면 처음 보는 감염균에도 대항할 확률이 높아질 테니 다다익선 아닐까. 적당히 중간 정도인 테라의 가짓수가 좋겠다고 가정해도, 또 한 가지 딜레마가 있다.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이 코딩하는 유전자 개수를 최대 2만5000개 정도로 예상했다(물 론 하나의 유전자가 여러 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항체를 비롯해 모든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는 태어나면서 부모님께 물려받아 이미 정해져 있다. 테라 가짓수의 항체 단백질을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 유전자의 전부가 항체를 코딩한다 해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사의한 항체 레퍼토리의 비밀은 1980년대 초 일본인 과학자 도네가와 스스무에 의해 밝혀진다. 항체 단백질의 구조는 기본 뼈대를 만드는 불변 부위(constant region)와 항원에 결합하는 가변 부위(variable region)로 구분할 수 있다. 항체의 다양성은 항원에 반응하는 가변 부위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도네가와의 발견은 가변 부위를 구성하는 유전자가 분절 (segmented)된 조각 유전자들의 조합으로 구성됨을 증명한 것이다. 블록 장난감 혹은 퀼트를 생각하면 쉽다.
조금 자세히 들어가자. 항체의 가변 부위는 V, D, J라는 분절된 유전자들이 V-D-J 순으로 이어져 만들어진다. 하지만 V, D, J를 코딩하는 유전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V분절은 조금씩 다른 아미노산 서열을 갖는 1번부터 40번까지 클러스터로 존재한다. D분절은 23개고, J분절은 6개다. 특정 항체의 항원에 반응하는 가변 부위는 V-D-J 분절들의 랜덤한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가변 부위는 V 10 - D7- J 1번이 모이고, 어떤 부위는 V7-D13-J5번이 만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항체의 뼈대는 같더라도 항원에 결합하는 가변 부위만 달라짐으로써 항체들이 항원에 특이적인 결합력을 가진 개별적인 수용체로 만들어진다. 다른 모양의 나사를 풀기 위해 드라이버 본체에 다른 노즐을 갈아끼우는 것에 비유해본다.
유전자 분절들의 재조합이 생식 세포가 아니라 체세포인 B림프구에서 일어나므로 학문적으로는 ‘체세포 재조합(somatic recombination)’이라고 부른다. 항체는 크기가 작고 가벼운 L사슬(light chain)과 무거운 H사슬(heavy chain)이 쌍으로 결합한 구조다.
각 사슬의 가변 부위는 각각의 재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인간 항체의 가짓수는 V, D, J 각 분절을 선택할 경우의 수를 곱한 1013개다.
다른 대표적 후천성 면역 수용체인 T세포 수용체(TCR·T Cell Receptor)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가능한 가짓수는 무려 1018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후천성 면역세포들은 재조합을 통해 오직 하나의 수용체만 만든다는 데 있다.
수용체 유전자가 재조합되면 염색체 상에서 더 이상 변형되지 않는 형태로 고정돼 그 형태로 딸세포가 물려받는다. 면역학자들은 이들을 ‘클론’이라고 부른다.
후천성 면역체계는 모든 생명체가 갖고 있지 않다. 식물은 후천성 면역이 없고 선천성 면역체계만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구 동물의 96% 이상은 선천성 면역만으로 별일 없이 산다.
동물의 진화를 추적하면, 인간과 유사한 후천성 면역체계는 턱과 이빨이 있는 상어와 같은 어류부터 발견된다. 여전히 왜 동물 진화의 특정 시기부터 후천성 면역이 발생했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선천성 면역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면역체계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후천성 면역체계의 상징은 위에서 언급한 유전자 재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재조합 활성화 유전자(RAG·RecombinationActivating Gene)’라는 단백질이다. RAG 단백질은 후천성 면역 수용체의 가변 부위 DNA에서 특정 분절을 찾아 구부리고, 자르고, 다른 분절과 이어 붙이는 식으로 염색체 (chromosome)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전자 분절들을 재조합해 가변 부위를 만든다. 바로 이 RAG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가 상어로 대표되는 무악류부터 나타난다. 후천성 면역의 특징
정리해보면, 후천성 면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후천성 면역은 비자기 물질에 반응할 수 있는 항체와 같은 ‘면역 수용체 풀(pool)’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비자기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만드는 것은 선천성 면역도 마찬가지이지만, 후천성 면역은 유전자 재조합을 통해 무작위적으로 광대한 레퍼토리의 수용체를 만든다.
또한, 각 면역세포가 개별 수용체 하나만을 가진 클론들로 존재하고 후천성 면역체계는 개별적인 클론들의 집단으로 유지된다. 클론 집단 전체의 수는 거대하지만, 개별적인 클론의 수는 최소로 유지함으로써 다양성을 유지한다. 감염균과 같은 항원을 만나면 다양한 클론들 중 항원에 친화력 이 높은 수용체를 가진 클론들이 반응한다.
이처럼 후천성 면역체계는 일단 만들어놓고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시스템이어서 ‘예기적 시스템(anticipatory system)’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 조각들을 주형으로 사용하지만, 무작위적인 재조합으로 후천성 수용체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특정 항원에 반응하는 수용체는 단백질 서열 상 똑같지 않을 확률이 높다.
즉 개개인이 특정 항원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백신과 같이 항원을 주입하면 대부분은 높은 친화력을 가진 항체를 생성한다. 면역세포 클론들 사이에서 적합한 클론이 결정되면, 버닛이 65년 전에 예측한 대로 클론 선택 과정을 통해 특정 클론이 압도적으로 수를 늘린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의도된 오류를 면역 수용체 유전자에 허용함으로써 하위 클론들을 만들어내고, 항원에 친화력이 가장 좋은 새로운 클론들을 탄생시킨다. 이 놀라운 자연 선택 과정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후천성 면역을 왜 영어로 ‘adaptive’ 혹은 ‘acquired immunity’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후천성 면역이 우주 밖 물질에도 반응할 태세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정할 때,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작위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한 후천성 면역(항체)은 어떻게 자기 세포나 조직을 공격하지 않는가’다.
*일부 글은 대니얼 데이비스의 <나만의 유전자>를 참고함.
<저자 소개>
이승우
바이러스면역학을 전공하고 포스텍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샌디에이고 라호야면역학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2012년부터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포면역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기초연구로는 점막기관 염증 및 감염 면역을, 응용연구로는 항암면역치료를 연구 중이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