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진의 바이오 뷰] 바이오업계의 시계, 정확한 것만이 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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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선진 플랫바이오 대표
지구상에는 서로 다른 인종, 역사, 종교, 문화, 교육적 배경 등을 갖고 있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고 혈연 같은 생물학적 관계나 철학, 관심사 등을 매개로 이뤄진 공동사회나 이익집단이 형성돼 있다. 물론 여러 가지 관점의 차이로 크고 작은 갈등이 벌어지지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성에 맞게 무한한 다양성을 극복하고 서로 인적·물적 교류를 하며 살고 있다.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바이오업계의 시계는?
이때 서로 다른 조건의 환경을 갖고 있는 국가나 사람들 간에 혼란과 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잣대와 기준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시간이다. 문명과 거리를 두고 완전한 자연생활을 하는 집단을 제외하면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의존하는 비중이 제일 큰 요소일 것이다.
지구가 평면이 아닌 원형이기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 따라 밤낮이 바뀌고 시차가 발생하며 날짜가 달라지는 수도 있다. 그래서 지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가상의 가로줄과 세로줄로 나누어 각 지역의 표준시를 정해놓았다. 덕분에 내가 사는 지역 혹은 위치에 따라 기준 시각을 알 수 있고 상대방의 시간도 알 수 있어, 다른 시간대에 속한 집단끼리도 혼동 없이 여러 가지 교류와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 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되돌리거나 돌이킬 수 없다. 현재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미래의 시간은 여러 기대와 예측을 동반하며 다가오고 있다.
만일 과거와 미래로 자유롭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미래 세계를 미리 가보고 문제를 야기할 현재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방지해서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한 천재 과학자가 빛보다 엄청 빠른 속도의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듯이 언젠가는 우리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자유롭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이 오면 나쁘거나 어려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 그저 평온하고 지나치게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목표를 달성할 동기부여가 없는 무료하고 밋밋한 삶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너무 이과적인 편향성을 가진 과학자의 기우일까.
예측 불가능한 신약 개발 분야, 정확한 시계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
본론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측정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시계다. 시계의 생명은 정확성이며 이는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에 달려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주기에 따라 가끔씩 세계의 표준시각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무브먼트의 기전이 원자, 수동이나 자동으로 감아지는 태엽,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모터, 혹은 수정(水晶)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방식이건 간에 오랜 기간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고 일정하게 초침과 분침, 혹은 숫자를 앞 방향으로 진행시켜야 한다.
시간의 정확함과 함께 무브먼트의 종류, 시계를 만드는 장인들의 혼과 손길이 닿은 화려한 장식, 그리고 제품의 역사와 전통 등이 시계의 가치(값)를 정하는 요소다. 사회 대부분의 분야는 ‘정확한’ 시계를 요구한다. 제품의 무브먼트 기전, 장인의 숨결이 깃든 정통성이나 가치보다 그저 정확한 시간을 가리킨다면 오히려 가성비가 좋은 값싸고 튼튼한 시계를 선호한다.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추어 미리 세워진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고 진행해서 애초 정해진 정확한 시간, 혹은 받아들이고 용납되는 오차범위 내의 시간에 목표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관례이며 성공이라고 간주된다.
즉 시계는 절대로 뒤로 가거나 불규칙하게 가서도 안 되고, 느려지거나 빨라져도 안 되며, 이렇게 정확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맞추어 모든 일을 정해진 시간에 완료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오 분야에도 이런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바이오 분야, 그중에서도 신약 개발은 정답이 없는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예측 불가한 분야이다. 후보물질의 발굴단계가 지연돼 전임상시험의 진입이 늦어지거나, 전임상시험에서 관찰되지 않았던 독성이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반면 기대하지 않았던 효능이 관찰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필요하다면 다시 뒤로 돌아가 부족한 연구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단계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 개발이 중단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계획에 없던 확대 또는 추가된 시험 등으로 개발 계획이 지연되면서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많은 신약 개발의 계획표를 보면 마치 생명이 없는 무기물을 합성해내는 것같이 기계적이고 1차원적으로 작성돼 있다. 심지어는 그 스케줄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는 발표를 듣곤 한다. 가끔은 고개가 갸우뚱해지곤 한다. 전 단계 시험의 완성도나 결과가 다음 단계로 진입할 충분한 근거로 삼기에는 공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앞으로 정확하게만 가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무조건 맞추어가려는 노력인 듯하다. 상식적으로 근거가 희박한 무리한 개발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고 더 큰 부작용을 만들 수밖에 없다.
바이오업계, 유연하고 진실된 연구 행위 필요
그렇다면 정답이 없는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바이오 분야에서 성공적인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어떤 시계가 필요할까.
성공적인 신약 개발은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재현성이 확인된 결과에 기반한다. 즉 부족한 데이터는 채우고,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결과로 판단되면 되돌아가서 확인과 검증을 하고, 필요하면 계획을 변경하는 등 유연하고 진실된 연구행위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미봉책, 무리하거나 허황된 계획, 이가 빠져 있는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과 결정, 요행을 바라거나 근거 없는 시도, 그리고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저 던져보는 도전의 끝은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파급되는 어려움과 감내해야 할 비난과 비판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큰 상처를 남긴다. 누가 보아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논리적이지만 성공하지 못한 도전, 과학적인 판단에 기반한 개발 중단과 같이 정당한 실패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음 도전의 밑거름이 된다.
바이오 분야는 무조건 ‘정확한’ 시계가 아니라 필요할 경우 뒤로도 가고, 섰다 갔다 하는 불규칙하고 가끔은 느리게도 가고 혹은 빨리도 가는 과학자의 진실성과 열의가 깃들어 있는 ‘정직한’ 시계가 필요하다.
<저자 소개>
김선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비뇨기과 전문의다. 일본국립암연구소의 초빙연구원을 거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교수로 근무했다. 한미약품 부사장을 역임하고 플랫바이오를 설립했다. 중개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암연구학회(AACR)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바이오업계의 시계는?
이때 서로 다른 조건의 환경을 갖고 있는 국가나 사람들 간에 혼란과 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잣대와 기준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시간이다. 문명과 거리를 두고 완전한 자연생활을 하는 집단을 제외하면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의존하는 비중이 제일 큰 요소일 것이다.
지구가 평면이 아닌 원형이기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 따라 밤낮이 바뀌고 시차가 발생하며 날짜가 달라지는 수도 있다. 그래서 지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가상의 가로줄과 세로줄로 나누어 각 지역의 표준시를 정해놓았다. 덕분에 내가 사는 지역 혹은 위치에 따라 기준 시각을 알 수 있고 상대방의 시간도 알 수 있어, 다른 시간대에 속한 집단끼리도 혼동 없이 여러 가지 교류와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 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되돌리거나 돌이킬 수 없다. 현재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미래의 시간은 여러 기대와 예측을 동반하며 다가오고 있다.
만일 과거와 미래로 자유롭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미래 세계를 미리 가보고 문제를 야기할 현재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방지해서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한 천재 과학자가 빛보다 엄청 빠른 속도의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듯이 언젠가는 우리의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자유롭게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이 오면 나쁘거나 어려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 그저 평온하고 지나치게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목표를 달성할 동기부여가 없는 무료하고 밋밋한 삶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너무 이과적인 편향성을 가진 과학자의 기우일까.
예측 불가능한 신약 개발 분야, 정확한 시계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
본론으로 돌아가서, 시간을 측정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시계다. 시계의 생명은 정확성이며 이는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에 달려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주기에 따라 가끔씩 세계의 표준시각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무브먼트의 기전이 원자, 수동이나 자동으로 감아지는 태엽,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모터, 혹은 수정(水晶)을 기본으로 하는 디지털 방식이건 간에 오랜 기간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고 일정하게 초침과 분침, 혹은 숫자를 앞 방향으로 진행시켜야 한다.
시간의 정확함과 함께 무브먼트의 종류, 시계를 만드는 장인들의 혼과 손길이 닿은 화려한 장식, 그리고 제품의 역사와 전통 등이 시계의 가치(값)를 정하는 요소다. 사회 대부분의 분야는 ‘정확한’ 시계를 요구한다. 제품의 무브먼트 기전, 장인의 숨결이 깃든 정통성이나 가치보다 그저 정확한 시간을 가리킨다면 오히려 가성비가 좋은 값싸고 튼튼한 시계를 선호한다.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추어 미리 세워진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고 진행해서 애초 정해진 정확한 시간, 혹은 받아들이고 용납되는 오차범위 내의 시간에 목표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관례이며 성공이라고 간주된다.
즉 시계는 절대로 뒤로 가거나 불규칙하게 가서도 안 되고, 느려지거나 빨라져도 안 되며, 이렇게 정확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맞추어 모든 일을 정해진 시간에 완료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오 분야에도 이런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바이오 분야, 그중에서도 신약 개발은 정답이 없는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예측 불가한 분야이다. 후보물질의 발굴단계가 지연돼 전임상시험의 진입이 늦어지거나, 전임상시험에서 관찰되지 않았던 독성이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반면 기대하지 않았던 효능이 관찰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필요하다면 다시 뒤로 돌아가 부족한 연구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단계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여 개발이 중단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계획에 없던 확대 또는 추가된 시험 등으로 개발 계획이 지연되면서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많은 신약 개발의 계획표를 보면 마치 생명이 없는 무기물을 합성해내는 것같이 기계적이고 1차원적으로 작성돼 있다. 심지어는 그 스케줄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는 발표를 듣곤 한다. 가끔은 고개가 갸우뚱해지곤 한다. 전 단계 시험의 완성도나 결과가 다음 단계로 진입할 충분한 근거로 삼기에는 공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앞으로 정확하게만 가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무조건 맞추어가려는 노력인 듯하다. 상식적으로 근거가 희박한 무리한 개발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고 더 큰 부작용을 만들 수밖에 없다.
바이오업계, 유연하고 진실된 연구 행위 필요
그렇다면 정답이 없는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바이오 분야에서 성공적인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어떤 시계가 필요할까.
성공적인 신약 개발은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재현성이 확인된 결과에 기반한다. 즉 부족한 데이터는 채우고,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결과로 판단되면 되돌아가서 확인과 검증을 하고, 필요하면 계획을 변경하는 등 유연하고 진실된 연구행위가 필요하다.
단기적인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미봉책, 무리하거나 허황된 계획, 이가 빠져 있는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과 결정, 요행을 바라거나 근거 없는 시도, 그리고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저 던져보는 도전의 끝은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파급되는 어려움과 감내해야 할 비난과 비판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큰 상처를 남긴다. 누가 보아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논리적이지만 성공하지 못한 도전, 과학적인 판단에 기반한 개발 중단과 같이 정당한 실패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음 도전의 밑거름이 된다.
바이오 분야는 무조건 ‘정확한’ 시계가 아니라 필요할 경우 뒤로도 가고, 섰다 갔다 하는 불규칙하고 가끔은 느리게도 가고 혹은 빨리도 가는 과학자의 진실성과 열의가 깃들어 있는 ‘정직한’ 시계가 필요하다.
<저자 소개>
김선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비뇨기과 전문의다. 일본국립암연구소의 초빙연구원을 거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교수로 근무했다. 한미약품 부사장을 역임하고 플랫바이오를 설립했다. 중개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암연구학회(AACR)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