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압축성장은 해도 '압축성숙'은 못 한다
‘압축성장은 가능해도 압축성숙은 불가능하다.’ 저작권자가 누군지는 불분명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식자들 사이에 회자된 말이다. 누구나 키가 훌쩍 크는 시기가 있지만 금방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성숙은 세월과 지식·경험이 축적돼야 한다. 국가도 똑같다. 1960년대 이후 선진국들 뒤통수만 보고 좇아간 덕에 기적 같은 압축성장을 이뤘다. 누가 봐도 외견은 소득 3만달러대 선진국이다. 그러나 정신, 윤리, 품격, 배려, 제도, 준법 같은 무형의 요소들은 따라오는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압축성장기 기업가들의 분투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거북선이 그려진 옛 500원권 지폐와 부지 항공사진만 갖고 조선소 지을 차관을 얻어낸 유명한 일화(현대중공업)부터 일본 반도체공장에 단체로 견학 가 걸음으로 잰 뒤 공장을 설계한 이야기(삼성전자),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던 ‘우향우 정신’(포항제철)….

‘하면 된다’와 ‘해봤어?’로 무장하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밤낮없이 누빈 덕에 이젠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다. K팝 영화 드라마 등 문화력까지 세계가 주목하는 ‘힙한’ 나라다. 역사 고비마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과 눈물 덕에 민주화도 이뤘다. 하지만 성취가 큰 만큼 공허함은 더 크게 다가온다. 언제까지 허구한 날 지지고 볶으며 허송해야 할까.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세대 넘게 흘렀건만, 민주주의는 되레 후진 중이다. 자유와 진실이란 절대가치가 무지와 억지, 포퓰리즘, 진영논리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정치판 시계는 거꾸로 돌고, 골 깊은 진영 갈등은 끝이 안 보인다. 조국·윤미향 사태, 대장동 게이트를 겪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합의가 안 된다. 투명성 낮은 저신뢰 사회의 전형이다.

5개월도 채 안 남은 대선판은 그런 혼돈의 집약판이다. 민주화 이후 여덟 번째 대통령을 뽑는데 유권자에겐 점점 고역이 돼간다. 국가비전을 주도해야 할 정치 담론은 ‘GSGG’ ‘손바닥 왕(王)자’ 같은 저열한 논쟁과 말꼬리 잡기에 머물러 있다. 나라 밖에까지 알려질까 봐 겁난다. ‘축(軸)’이 바뀌는 대전환기에 미래를 위한 혁신은커녕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이들의 난장판이다. 오죽하면 정치인 자격시험이라도 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겠나 싶다.

서구 선진국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해서, 그들이 수백 년간 쌓아올린 ‘성숙과 숙고’의 아비투스까지 거저 따라오진 않는다. 이런 지체를 설명하는 데는 ‘리비히의 최소량 법칙’이 안성맞춤이다. 식물의 생장은 여러 필수 영양소 중 최소량으로 존재하는 영양소에 의해 결정되듯, 나라를 구성하는 무수한 분야 중 제일 뒤처진 것이 국격과 국가경쟁력을 좌우하지 않는가. 기업과 문화 경쟁력이 높아질수록 정치 퇴행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국가의 총체적 수준은 정치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정치판 탓만 할 일도 아니다. 사명감, 기강, 청렴으로 채워야 할 공직자의 머릿속에 줄대기, 자리보전, 한탕주의가 자리잡는다. 지식인 사회에 참된 지식이 없고, 시민사회에는 시민이 없다. 최후 보루인 사법부조차 신뢰하기 어렵고, 흐물흐물해진 사정기관들은 짠맛을 잃었다. 같은 진영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만큼 거짓말도 쉽게 용인된다.

성숙 사회가 되려면 숙고하는 개개인이 다수가 돼야 한다. 숙고는 검색이 아니라 독서와 사색에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선진국 중 책을 가장 안 읽는 나라다. 지난해 조사에서 성인 10명 중 4.5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다. 한 달 독서량은 전자책·오디오북까지 합쳐 0.6권(연간 7.5권)이다. 1년 도서구입비(3만5000원)가 한우 1인분 값도 안 된다. 해마다 거꾸로 신기록이다. 문맹은 사라졌는데 문해력은 점점 떨어진다. 대신 유튜브를 월 30시간 보고, 먹방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나오는 족족 히트다.

초고령 국가로 달려가는데 성숙한 담론과 진지한 성찰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국민 중위연령이 1980년 21.8세에서 2020년 43.8세로 스물두 살이나 높아졌는데도 그렇다. 그러니 정치가 그 모양 그 꼴이 아니겠나. 문제없는 나라가 없듯이 우리나라는 격차, 일자리, 부동산, 가계빚, 재정 악화, 내수 위축, 탈원전, 교육 퇴보, 연금 고갈, 규제 만능, 미·중 대립, 북핵 등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문제가 많은 게 위기가 아니다. 문제를 알고도 눈감고 해결할 능력이 실종된 게 진짜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