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 OVERVIEW] ‘0’이 바꾸는 바이오 헬스케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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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3년 디지털 치료제를 소프트웨어 의료기기(SaMD)로 분류해 규제체계를 신설했다. 또한 사전인증 시범사업이나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통해 우선 판매를 승인한 뒤 실제 성능 데이터(RWE)를 수집해 이를 검증하는 식으로 길을 열어주고 있다.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 또한 지난해 디지털 치료기기 허가·심사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관련 규제를 보완해나가고 있다.
바이오업계는 미국 FDA를 비롯한 한국 식약처 등 주요 국가의 허가당국이 디지털 치료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디지털 치료제가 혁신신약과 달리 침습적이지 않은 데다 대부분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규제기관이 볼 때 비교적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만성질환 및 지속관리가 필요한 질환의 치료 및 관리에 디지털 치료제가 사회적 비용을 경감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교적 낮은 규제 허들은 산업 발전 속도를 가속할 수 있다. 기존 신약 대비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더 적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임상 단계 또한 동물실험이나 독성평가 등 전임상시험 없이 ‘탐색임상(기존 임상의 1·2상에 해당)’과 ‘확증임상(기존 임상 3상)’ 2단계만 거치면 된다.
‘인수합병’ ‘공동개발’…숨 가쁜 디지털 치료제 시장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는 허가당국의 우호적인 기조 등에 비춰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올해 41억4000만 달러(약 4조9535억 원)에서 2025년엔 89억4000만 달러(약 10조6967억 원)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평균 성장률(CAGR)은 20.5%다.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업체들에 투입되는 투자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 액셀러레이터인 록헬스가 지난 7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 투자된 금액은 146억 달러(17조4689억 원)였다. 5년 전인 2015년 47억 달러(5조6142억 원)가 투자된 것에 비하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록헬스는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5년간 인수합병(M&A) 건수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첨언했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바빠졌다. 자사 파이프라인과 ‘궁합’이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에 발 빠르게 러브콜을 보내거나, 아예 적합한 인수 대상을 찾기 위해서다.
지난해 노바티스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 앰블리오테크의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 앰블리오테크는 3D 안경과 비디오게임을 이용해 약시(弱視)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사다. 초기 임상연구에서 앰블리오테크는 어린이와 성인 양쪽에서 시력 개선을 입증했다.
비만치료제 삭센다로 잘 알려진 노보 노디스크는 눔(NOOM)과 비만치료제 개발 관련 협력을 2019년부터 시작했다. 눔은 디지털 치료제로 분류되지 않지만 건강을 관리한다는 면에서 자주 거론되는 곳이다.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볼룬티스는 다수의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볼룬티스는 2018년부터 아스트라제네카와 손잡고 표적항암제 세디라닙과 올라파립 병용 임상 3상에 참여하고 있다. 임상환자들에게 디지털 치료제를 제공해 부작용과 위험을 낮출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노바티스와도 2019년부터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을 시작했다.
해피파이헬스도 다발성 경화증 때문에 우울증과 불안을 겪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2019년부터 사노피와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을 나섰다. 해피파이헬스의 우울증 및 불안증세 치료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는 지난 7월 FDA 승인을 받았다. 정신질환에서 점점 영역 넓히는 디지털 치료제
제약업계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지난 6월 개발 중이거나 시장에 나온 디지털 치료제는 137개였다. 이 중 발굴 단계인 치료제는 33개, 탐색임상을 진행 중인 치료제는 46개, 확증임상 중인 치료제는 10개였다. 25개가 허가 당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승인을 면제받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치료제는 23개였다.
적응증으로 구분하면 정신질환 쪽을 겨냥해 임상을 진행하거나 출시된 디지털 치료제가 가장 많았다. 137개 디지털 치료제 중 정신질환 대상이 37%, 신경질환 31%, 위장질환 5%, 여성건강 5%, 감염병 5%, 내분비계 질환 5% 등이다.
FDA 승인 현황을 보면 단연 정신질환 관련 디지털 치료제가 가장 많다. 2017년 FDA 첫 승인을 받은 디지털 치료제인 페어테라퓨틱스의 리셋(reSET)과 ‘리셋-O(reSET-O)’는 각각 물질중독장애, 아편유사제중독장애 디지털 치료제로 정신질환 카테고리에 해당한다. 같은 회사에서 개발한 불면증 치료제 ‘솜리스트’도 마찬가지다. 2018년 FDA 승인을 받은 팰로앨토 헬스사이언스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제 ‘프리스피라’, 지난해 FDA 승인을 받은 아킬리 인터랙티브의 소아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 ‘인데버RX’도 정신질환 분야에 속한다.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디지털 치료제도 FDA 승인을 받아 시장에 나오고 있다.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의 향정신병 약물 복용 및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패치와 앱이 2017년 FDA의 승인을 받았다. 볼룬티스는 암 환자들이 증상과 부작용을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 치료제로 2019년 FDA 승인을 받았다.
디지털 치료제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가령 페어테라퓨틱스의 리셋과 솜리스트 등이 정신과에서 이전까지 사용해온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게임 등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아킬리의 인데버RX가 대표적이다. 게임 형태 디지털 치료제가 FDA 승인을 받은 것은 인데버RX가 처음이다. 인데버RX는 8~12세 ADHD 환자 치료를 위한 게임으로,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캐릭터를 조종하는 게임이다. 장애물을 피하는 동안에도 주위를 계속 살펴야 해 주의력에 관여하는 뇌의 주요 부위에 선택적인 자극을 주는 원리로 ADHD를 치료한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아킬리의 주요 투자자로는 암젠과 머크 등 글로벌 제약사 외에도 국내에선 미래에셋캐피털이 투자에 참여했다.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의 조현병 및 우울증 관리용 디지털 치료제 ‘어빌리파이 마이사이트’는 약과, 센서, 앱을 병용하는 형태로 설계됐다. 주요 우울장애, 양극성 장애 등 환자가 복용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아리피프라졸 알약에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는 모래알 크기의 센서를 집어넣었다. 이 센서가 든 알약을 복용하면 흉부에 붙인 패치가 이를 감지해 앱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우울증 및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복용순응도가 낮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어빌리파이 마이사이트가 얼마나 복용순응도를 개선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국내 디지털 치료제 개발업체 현황
국내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로는 뉴냅스, 라이프시맨틱스, 에임메드, 에스알파, 웰트 등이 있다.
뉴냅스는 지난 6월 뇌 손상 후 시야장애 개선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 ‘뉴냅비전’의 확증 임상시험계획을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았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로선 식약처로부터 처음으로 임상승인을 받았다. 뇌 손상 후 시야장애란 시각중추가 손상돼 눈과 시신경엔 문제가 없음에도 시야가 좁아지는 장애를 말한다. 뉴냅스는 탐색임상에서 시야 개선 효과를 확인했다.
라이프시맨틱스 또한 지난 9월 식약처로부터 호흡재활 분야 처방 디지털 치료제(PDT) ‘레드필 숨튼’의 확증 임상계획 승인을 받았다. 호흡질환 재활센터의 역할을 대신해 환자의 산소포화도, 심박수, 운동량 등을 측정하고 재활운동을 모니터링하는 기능 등을 담았다.
에임메드도 지난 9월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치료제 ‘솜즈’의 확증 임상계획에 대한 승인을 식약처로부터 받았다. 솜즈를 처방받은 불면증 환자와, 솜즈와 유사하게 생겼지만 다른 ‘가짜 솜즈’를 처방받은 불면증환자 두 그룹을 비교하는 임상을 진행할 계획이다.
에스알파는 소아 근시의 진행을 억제하는 데 사용되는 디지털 치료제 ‘SAT-001’의 임상을 올 초 승인받아 시작했다. 삼성전자에서 2016년 스핀오프한 웰트는 알코올 중독과 불면증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독으로부터 30억 원 지분투자를 받아, 한독과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에 나섰다. INTERVIEW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치료제 시대
“코로나19의 유행으로 비대면이 주목받으며 디지털 치료제가 더 빠르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의 최윤섭 대표는 지금의 시장 상황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만성질환 환자들이 병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올 연말까지 정신건강 관련 디지털 치료제의 인허가를 면제해주겠다는 강도 높은 장려책까지 꺼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허가당국이 문을 연 만큼 디지털 치료제 시장을 바라보는 투자업계의 기대감도 덩달아 커졌다고 했다. 최 대표는 “올해 상반기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투자된 벤처자금이 지난 한 해 동안 투자된 것과 비등할 정도”라며 “연말에 이르면 올해 투자금이 지난해 대비 2배는 될 것”이라고 했다.
최 대표는 디지털 치료제 업계에서 유명인사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전공하고, 전산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대 의대에서 연구교수, KT종합기술원 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디지털 헬스케어에 관심이 생겨 책을 쓰고 강연 등에 나서다 아예 직접 나서 투자를 해보자는 마음에 액셀러레이터인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를 설립했다. 5000명의 구독자가 있는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업체에 직접 투자하고 싶어 투자사를 설립했음에도 그는 자신을 ‘버블론자’라고 소개했다. 시장의 기대가 기업의 가치를 추월했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선구자로 꼽히는 페어테라퓨틱스 또한 물질중독장애 치료제 리셋을 시장에 내놓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처방 건수가 2만 건에 그친다”며 “미국 전역에서 처방된 건수로 보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인 디지털 치료제가 의료환경에서 실제로 사용될 만큼 확산되는 데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질특허가 불가능한 디지털 치료제의 특성도 투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가령 페어테라퓨틱스의 ‘솜리스트’와 에임메드의 ‘솜즈’는 모두 정신의과학의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치료제다. 최 대표는 “한 적응증에 대해 여러 디지털 치료제가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텐데 경쟁우위 진입장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현 시점에선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디지털 치료제 시장은 분명 커지고 있다. 그는 “닷컴버블이 그러했듯 어떤 산업이든 성장하기 위해선 버블은 거쳐가야 하는 단계일 뿐”이라며 “위험을 감내하고 발 빠르게 투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에 디지털 치료제가 자리를 잡고 성과를 내는 시기에 안전하게 투자할 것인지 선택의 문제만 남았다”며 웃었다.
이우상 기자
*이 기사는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바이오업계는 미국 FDA를 비롯한 한국 식약처 등 주요 국가의 허가당국이 디지털 치료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디지털 치료제가 혁신신약과 달리 침습적이지 않은 데다 대부분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규제기관이 볼 때 비교적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만성질환 및 지속관리가 필요한 질환의 치료 및 관리에 디지털 치료제가 사회적 비용을 경감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교적 낮은 규제 허들은 산업 발전 속도를 가속할 수 있다. 기존 신약 대비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더 적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임상 단계 또한 동물실험이나 독성평가 등 전임상시험 없이 ‘탐색임상(기존 임상의 1·2상에 해당)’과 ‘확증임상(기존 임상 3상)’ 2단계만 거치면 된다.
‘인수합병’ ‘공동개발’…숨 가쁜 디지털 치료제 시장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는 허가당국의 우호적인 기조 등에 비춰 디지털 치료제 시장이 올해 41억4000만 달러(약 4조9535억 원)에서 2025년엔 89억4000만 달러(약 10조6967억 원)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평균 성장률(CAGR)은 20.5%다.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업체들에 투입되는 투자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 액셀러레이터인 록헬스가 지난 7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업계에 투자된 금액은 146억 달러(17조4689억 원)였다. 5년 전인 2015년 47억 달러(5조6142억 원)가 투자된 것에 비하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록헬스는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5년간 인수합병(M&A) 건수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첨언했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바빠졌다. 자사 파이프라인과 ‘궁합’이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에 발 빠르게 러브콜을 보내거나, 아예 적합한 인수 대상을 찾기 위해서다.
지난해 노바티스는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 앰블리오테크의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 앰블리오테크는 3D 안경과 비디오게임을 이용해 약시(弱視)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사다. 초기 임상연구에서 앰블리오테크는 어린이와 성인 양쪽에서 시력 개선을 입증했다.
비만치료제 삭센다로 잘 알려진 노보 노디스크는 눔(NOOM)과 비만치료제 개발 관련 협력을 2019년부터 시작했다. 눔은 디지털 치료제로 분류되지 않지만 건강을 관리한다는 면에서 자주 거론되는 곳이다.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는 볼룬티스는 다수의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볼룬티스는 2018년부터 아스트라제네카와 손잡고 표적항암제 세디라닙과 올라파립 병용 임상 3상에 참여하고 있다. 임상환자들에게 디지털 치료제를 제공해 부작용과 위험을 낮출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노바티스와도 2019년부터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을 시작했다.
해피파이헬스도 다발성 경화증 때문에 우울증과 불안을 겪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2019년부터 사노피와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을 나섰다. 해피파이헬스의 우울증 및 불안증세 치료를 위한 디지털 치료제는 지난 7월 FDA 승인을 받았다. 정신질환에서 점점 영역 넓히는 디지털 치료제
제약업계 시장조사기관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지난 6월 개발 중이거나 시장에 나온 디지털 치료제는 137개였다. 이 중 발굴 단계인 치료제는 33개, 탐색임상을 진행 중인 치료제는 46개, 확증임상 중인 치료제는 10개였다. 25개가 허가 당국의 승인을 받았으며, 승인을 면제받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치료제는 23개였다.
적응증으로 구분하면 정신질환 쪽을 겨냥해 임상을 진행하거나 출시된 디지털 치료제가 가장 많았다. 137개 디지털 치료제 중 정신질환 대상이 37%, 신경질환 31%, 위장질환 5%, 여성건강 5%, 감염병 5%, 내분비계 질환 5% 등이다.
FDA 승인 현황을 보면 단연 정신질환 관련 디지털 치료제가 가장 많다. 2017년 FDA 첫 승인을 받은 디지털 치료제인 페어테라퓨틱스의 리셋(reSET)과 ‘리셋-O(reSET-O)’는 각각 물질중독장애, 아편유사제중독장애 디지털 치료제로 정신질환 카테고리에 해당한다. 같은 회사에서 개발한 불면증 치료제 ‘솜리스트’도 마찬가지다. 2018년 FDA 승인을 받은 팰로앨토 헬스사이언스의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제 ‘프리스피라’, 지난해 FDA 승인을 받은 아킬리 인터랙티브의 소아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 ‘인데버RX’도 정신질환 분야에 속한다.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디지털 치료제도 FDA 승인을 받아 시장에 나오고 있다.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의 향정신병 약물 복용 및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패치와 앱이 2017년 FDA의 승인을 받았다. 볼룬티스는 암 환자들이 증상과 부작용을 관리할 수 있는 디지털 치료제로 2019년 FDA 승인을 받았다.
디지털 치료제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가령 페어테라퓨틱스의 리셋과 솜리스트 등이 정신과에서 이전까지 사용해온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게임 등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아킬리의 인데버RX가 대표적이다. 게임 형태 디지털 치료제가 FDA 승인을 받은 것은 인데버RX가 처음이다. 인데버RX는 8~12세 ADHD 환자 치료를 위한 게임으로,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캐릭터를 조종하는 게임이다. 장애물을 피하는 동안에도 주위를 계속 살펴야 해 주의력에 관여하는 뇌의 주요 부위에 선택적인 자극을 주는 원리로 ADHD를 치료한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아킬리의 주요 투자자로는 암젠과 머크 등 글로벌 제약사 외에도 국내에선 미래에셋캐피털이 투자에 참여했다.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의 조현병 및 우울증 관리용 디지털 치료제 ‘어빌리파이 마이사이트’는 약과, 센서, 앱을 병용하는 형태로 설계됐다. 주요 우울장애, 양극성 장애 등 환자가 복용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아리피프라졸 알약에 프로테우스 디지털헬스는 모래알 크기의 센서를 집어넣었다. 이 센서가 든 알약을 복용하면 흉부에 붙인 패치가 이를 감지해 앱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우울증 및 양극성 장애 환자들이 복용순응도가 낮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어빌리파이 마이사이트가 얼마나 복용순응도를 개선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국내 디지털 치료제 개발업체 현황
국내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로는 뉴냅스, 라이프시맨틱스, 에임메드, 에스알파, 웰트 등이 있다.
뉴냅스는 지난 6월 뇌 손상 후 시야장애 개선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 ‘뉴냅비전’의 확증 임상시험계획을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았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사로선 식약처로부터 처음으로 임상승인을 받았다. 뇌 손상 후 시야장애란 시각중추가 손상돼 눈과 시신경엔 문제가 없음에도 시야가 좁아지는 장애를 말한다. 뉴냅스는 탐색임상에서 시야 개선 효과를 확인했다.
라이프시맨틱스 또한 지난 9월 식약처로부터 호흡재활 분야 처방 디지털 치료제(PDT) ‘레드필 숨튼’의 확증 임상계획 승인을 받았다. 호흡질환 재활센터의 역할을 대신해 환자의 산소포화도, 심박수, 운동량 등을 측정하고 재활운동을 모니터링하는 기능 등을 담았다.
에임메드도 지난 9월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치료제 ‘솜즈’의 확증 임상계획에 대한 승인을 식약처로부터 받았다. 솜즈를 처방받은 불면증 환자와, 솜즈와 유사하게 생겼지만 다른 ‘가짜 솜즈’를 처방받은 불면증환자 두 그룹을 비교하는 임상을 진행할 계획이다.
에스알파는 소아 근시의 진행을 억제하는 데 사용되는 디지털 치료제 ‘SAT-001’의 임상을 올 초 승인받아 시작했다. 삼성전자에서 2016년 스핀오프한 웰트는 알코올 중독과 불면증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독으로부터 30억 원 지분투자를 받아, 한독과 디지털 치료제 공동개발에 나섰다. INTERVIEW
최윤섭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 대표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치료제 시대
“코로나19의 유행으로 비대면이 주목받으며 디지털 치료제가 더 빠르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디지털헬스케어 분야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의 최윤섭 대표는 지금의 시장 상황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만성질환 환자들이 병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올 연말까지 정신건강 관련 디지털 치료제의 인허가를 면제해주겠다는 강도 높은 장려책까지 꺼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허가당국이 문을 연 만큼 디지털 치료제 시장을 바라보는 투자업계의 기대감도 덩달아 커졌다고 했다. 최 대표는 “올해 상반기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에 투자된 벤처자금이 지난 한 해 동안 투자된 것과 비등할 정도”라며 “연말에 이르면 올해 투자금이 지난해 대비 2배는 될 것”이라고 했다.
최 대표는 디지털 치료제 업계에서 유명인사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전공하고, 전산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대 의대에서 연구교수, KT종합기술원 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디지털 헬스케어에 관심이 생겨 책을 쓰고 강연 등에 나서다 아예 직접 나서 투자를 해보자는 마음에 액셀러레이터인 디지털헬스케어파트너스를 설립했다. 5000명의 구독자가 있는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디지털 치료제 개발업체에 직접 투자하고 싶어 투자사를 설립했음에도 그는 자신을 ‘버블론자’라고 소개했다. 시장의 기대가 기업의 가치를 추월했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선구자로 꼽히는 페어테라퓨틱스 또한 물질중독장애 치료제 리셋을 시장에 내놓은 지 4년이 지났지만 처방 건수가 2만 건에 그친다”며 “미국 전역에서 처방된 건수로 보면 미미한 수준”이라고 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인 디지털 치료제가 의료환경에서 실제로 사용될 만큼 확산되는 데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질특허가 불가능한 디지털 치료제의 특성도 투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가령 페어테라퓨틱스의 ‘솜리스트’와 에임메드의 ‘솜즈’는 모두 정신의과학의 불면증 인지행동치료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치료제다. 최 대표는 “한 적응증에 대해 여러 디지털 치료제가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텐데 경쟁우위 진입장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현 시점에선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디지털 치료제 시장은 분명 커지고 있다. 그는 “닷컴버블이 그러했듯 어떤 산업이든 성장하기 위해선 버블은 거쳐가야 하는 단계일 뿐”이라며 “위험을 감내하고 발 빠르게 투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에 디지털 치료제가 자리를 잡고 성과를 내는 시기에 안전하게 투자할 것인지 선택의 문제만 남았다”며 웃었다.
이우상 기자
*이 기사는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