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항암제는 암 환자의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암세포를 공격하는 치료제로 세포독성항암제, 표적항암제에 이어 3세대 항암제로 불린다.

환자의 몸속 면역체계를 활용하기 때문에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이 덜하고 일단 치료 반응이 시작되면 오랫동안 치료가 유지돼 생존기간을 늘리고 삶의 질을 증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특정 환자군에서는 치료 반응이 없거나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약제비용이 비싸 건강보험 보장을 받지 못할 경우 1년 약값만 1억 원 정도로 경제적 부담이 크다.

다행히도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와 동시에 일부 암 환자에게는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도 포함되면서 대상 환자는 치료비용 부담 없이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마침내 열리게 됐다.

다만 모든 식약처 허가 대상 환자에게 건강보험 보장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실제 면역항암제의 긍정적인 치료 반응이 예상되는 환자군에서도 보험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경제적 부담 문제로 면역항암제를 처방할 수 없는 상황을 빈번했다.

당시에는 면역항암제 효과 예측을 위해 실시하는 면역관문물질인 PD-L1(Programmed Death-Ligand 1) 검사 결과, 양성도(종양세포 중 PD-L1이 발현하는 비율)가 10% 이상인 환자를 기준으로 면역항암제 사용 여부를 결정했다. 하지만 양성도가 0%에 가까운 환자들도 면역항암제 효과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기에 단순히 양성도 수치에만 의존해 치료받을 사람과 치료받지 못할 사람을 나누는 것에 대한 우려와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모든 표준치료에 실패해 더 이상 면역항암제 이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들도 보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면역항암제를 시도조차 못해본 경우가 부지기수다. 일부 환자는 PD-L1 결과가 10% 이상이 나올 때까지 여러 차례 조직검사를 요청하는 안타까운 일도 생기고 있다.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암 조직 영상 판독

국내 의료법은 병리학과 의사가 PD-L1 양성도 값을 판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사가 판독해야 하는 PD-L1 검사는 전체 슬라이드에 있는 약 10만~100만 개의 세포를 모두 판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지침상 적어도 100개 이상의 세포를 분석해 최종 판독을 내리도록 정해져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판독할 경우 대부분은 정확한 판독이 가능하지만, 일부의 경우 병리학과 의사 사이에서도 상이한 판독 결과를 제시하는 경우도 보고된 바 있다.

그러므로, 병리학 판독 과정에서 이런 넓은 슬라이드 영역에 AI를 활용해 환자 치료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수천, 수만 가지 데이터를 빠르게 읽고 해석 가능한 AI의 장점이 의료 현장에도 필요해진 시점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기업에서는 최신 의료 AI 기술을 통해 디지털화된 암 조직 영상을 분석해 보여준다. 기존 병리학과 의사가 슬라이드의 전체적인 영역을 먼저 훑어본 후 중요하다고 판단한 부위별로 고배율로 판독하는 행태와 다르게, AI는 슬라이드의 전체 영역을 고배율로 분석하며 하나하나의 세포를 선입견 없이 빠르고 면밀하게 판독한다.

이런 기술력 덕분에 AI는 병리학과 의사가 중요도를 낮게 판단한 부위에도 객관적인 판독 결과를 보여줄 수 있으며, 이는 전체적인 병리 판독 과정에서의 효율성과 정확도를 높인다.

AI가 슬라이드 한 장을 분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5분 이내이며, 분석이 끝나면 암세포와 면역세포가 어떻게 분포돼 있는지, 각 세포에서 PD-L1 발현도가 어떠한지에 대한 분석 내용을 리포트 형태로 제공한다. 게다가 사람의 눈으로는 언뜻 파악하기 쉽지 않은 세포와 세포 간 공간적 위치 관계 분석을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서울 도로 위에 놓인 차량들의 위치 분포와 속도를 파악하여 개별 차량에 효율적인 길을 안내해주는 것과 비슷한 알고리즘이라 할 수 있다.
[Cover Story - INSIDE] 인공지능(AI)은 어떻게 진단의 영역을 바꾸는가
진단을 넘어서 AI를 활용한 치료까지

이처럼 의료 AI 기술은 각종 논문과 글로벌 학회 등을 통해 연구 결과를 꾸준히 발표하며 우수성과 유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올해 6월 열린 미국 임상종양학회(ASCO)에서는 AI를 활용한 암 치료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주목을 받았다. 연구에서는 비소세포폐암 환자 479명을 대상으로 PD-L1 검사를 진행한 결과, AI 판독성능은 3명의 병리학과 의사의 합의된 판독과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병리학과 의사와 AI의 의견이 불일치한 경우다. 3명의 병리학과 의사의 합의된 판독 결과 ‘PD-L1 < 1%’로 매우 낮다고 판단한 슬라이드 중 47.6%(40/84)의 경우 AI는 PD-L1이 1% 이상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면역항암제를 치료한 결과를 비교해보니, AI의 판독 결과 1% 이상이라고 했던 군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환자군보다 유의하게 높은 종양반응률과 무병치료생존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PD-L1 < 1%’라고 판독이 되면 면역항암제의 치료 반응이 거의 없을 것이라 판단되어 임상현장이나 임상시험에서 면역항암제 치료가 배제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는 그중 절반 정도의 환자군을 AI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 치료 대상으로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연구는 AI를 의료 현장 및 임상시험 과정에 활용하면 면역항암제 치료 대상이 아닌 환자들 가운데 치료 반응을 보일 수 있는 환자를 추가로 찾아낼 수 있어 더 많은 환자가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항암제 신약의 임상개발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학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차세대 바이오마커로 떠오르는 AI

이처럼 의료 환경에서 AI 기술은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따라 효과적인 치료제를 제시하기까지 지속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 의사들이 담당하던 병리진단을 의사와 AI가 함께 검증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이고 정확한 판독이 가능해질 뿐 아니라, 나아가 환자 상황에 맞는 적절한 치료제를 사용하는 판단 근거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한 AI는 새로운 바이오마커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세포, 혈관, 단백질, DNA, RNA 등 기존 생화학적 지표와 달리 인공지능을 통해 정상과 병리를 객관적으로 측정 및 평가하는 아예 새로운 영역의 바이오마커가 되는 셈이다.

최근 의료 AI 기업과 제약회사들이 공동 임상시험에 적극 나서는 것도 향후 AI가 새로 발견하는 병리 영역에서 신약 개발이 가능할 거란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이에 따라 제약회사와 의료 AI 기업 간 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제약회사가 약을 개발한 이후 AI 기업이 병리 분석을 통해 이 약이 실제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증하거나 제약회사가 이미 진행한 임상시험을 AI로 재분석해 임상 결과의 정확도를 높이는 한편, 치료 반응을 높일 수 있는 환자군을 특정하는 등 AI를 접목한 신약 개발을 하기 위해서다.

의료 AI 기업의 최종 목표는 AI 기술이 보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 효과 예측을 가능하게 하고, 환자별로 신속한 맞춤형 치료를 통해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제 AI로 암을 정복하는 시대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Cover Story - INSIDE] 인공지능(AI)은 어떻게 진단의 영역을 바꾸는가
<저자 소개>

[Cover Story - INSIDE] 인공지능(AI)은 어떻게 진단의 영역을 바꾸는가
옥찬영
종양내과 전문의로 2019년까지 서울대학교병원 종양내과에서 진료교수로 근무했다. 서울대 의과대에서 중개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면역항암제의 치료 예측 바이오마커 개발에 관한 연구를 했다. 국제학술지에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루닛의 최고의학책임자로 근무 중이다. 제품의 기획부터 의료데이터의 수집과 관리, 인공지능(AI) 연구, 인허가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