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1926~1956) : 1926년 강원 인제 출생. 평양의학전문학교 수학.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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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목마와 숙녀’에서 ‘세월이 가면’까지
1956년 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때였지요. 시인 박인환은 10년 넘게 찾아보지 못한 망우리의 첫사랑 묘지에 다녀왔습니다. 스무 살 풋풋한 나이에 무지개처럼 만났다가 헤어진 여인의 ‘눈동자’와 ‘입술’은 흙에 덮여 사라졌지만 그에게 남은 회한은 컸지요.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명동 대폿집에서 쓴 시로 노래까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요. 영원히 떠날 마지막 길에 연인의 무덤을 어루만지며 작별을 고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때 이미 ‘세월이 가면’의 초고가 몇 문장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명동의 문인 사랑방 ‘명동싸롱’에서 허한 가슴을 달래던 그는 맞은편 대폿집 ‘경상도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곳에는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있었죠. 술잔이 몇 차례 돌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진섭이 박인환에게 “시를 써 주면 나애심에게 불러 달라고 할게”라고 했죠. 그는 펜을 꺼냈습니다. 즉흥시를 넘겨다보던 이진섭이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하자 나애심이 콧노래로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세월이 가면’입니다.

한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 ‘명동백작’ 이봉구 등이 합석했습니다. 임만섭이 이 노래를 다듬어 부르자 길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죠.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한 명동 뒷골목에서 시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행인들. 영화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31세, 망우리 묘지에 묻히다

이 시를 쓴 지 1주일 만인 1956년 3월 20일 밤에 박인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인 이상 추모의 밤’에서 폭음하고 세종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고,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눈을 감았지요. 심장마비였습니다. 우리 나이로 31세.

그는 동료 시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망우리 묘지에 묻혔습니다. 첫사랑이 누워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관에 생전 그렇게 좋아했던 술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어줬지요.

‘세월이 가면’은 그가 죽기 1년 전(1955년)에 낸 유일한 시집 『박인환 선시집(朴寅煥選詩集)』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1956년에 썼으니 당연하죠. 이 시는 유족들이 20주기를 추모해 1976년에 낸 시집 『목마와 숙녀』에 실렸습니다. 예전 시집의 56편 중 54편과 유작, 지상에 발표했지만 빠진 7편을 합쳐 61편을 엮은 것이었지요.

이 시는 박인희 노래로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노랫말은 시 원문과 조금 달라졌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았죠. 박인희가 ‘목마와 숙녀’까지 낭송해서 둘이 남매가 아닌가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비슷했을 뿐이지요.

최근 영어 번역시집으로 재탄생

마침 영문학자인 여국현 시인이 박인환 시인의 『선시집(選詩集)』을 영어로 옮긴 『THE COLLECTED POEMS』(푸른사상)를 출간했군요. 한글시와 번역시를 나란히 배치해 두 언어를 비교하며 음미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박인환 시인의 고향인 인제군의 문화재단 지원으로 출간됐다니 더욱 의미가 큽니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목마와 숙녀’에서 ‘세월이 가면’까지

여국현 시인은 역자 후기에서 “흔히 ‘댄디 보이’ 혹은 ‘모던 보이’라고 일컬어지는 박인환 시인은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에는 당대 현실에 대한 예리한 인식과 사고가 깊이 담겨 있다”며 “전쟁을 포함한 조국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슬픔과 좌절 등 시인의 또 다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박인환 시 ‘목마와 숙녀’를 한글과 영어로 함께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A Wooden Horse and a Lady

Having a drink
We are talking of Virginia Woolf’s life
And the hem of a lady’s dress who has gone riding on a wooden horse.
It has disappeared into the autumn tinkling just its bells,
Leaving its owner behind A star falls from a bottle.
The heart-broken star is shattered lightly against my heart.
When the girl I kept in touch with for a while
Grows up by the grasses and trees in the garden,
Literature dies away and life fades out
And even the truth of love forsakes
The shadows of love and hate,
My beloved one on the wooden horse is not to be seen.
lt’s true that the days come and go
The time of us withers away to avoid isolation
And now we should say goodbye
Hearing the bottle falling by the wind,
We must look into the eyes of the old female novelist.
‥‥To the Lighthouse‥‥
Though the light is no more to be seen,
For the future of pessimism we cherish for nothing,
We must remember the mournful sounds of the wooden horse
Whether everything leaves or dies,
Even just with gripping the dim consciousness lighting up in the minds,
We must listen to the sorrowful tales of Virginia Woolf
Like a snake that has found its youth after creeping between the two rocks,
We must drink a glass of liquor with open eyes.
As life is not lonely
But just vulgar as the cover of a magazine,
Why do we apart for fear of something to regret.
When the wooden horse is in the sky
And its bells are tinkling at our ears,
When the autumn wind mourns hoarsely
In the fallen bottle of mine.

(trs. by Yeo, Kook-Hyun)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