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군웅이 할거하던 일본 전국시대에 ‘다이묘(大名)’로 불린 영주들은 항상 신변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과 닮은 사람을 골라 대역(代役)을 맡겼는데 이를 ‘가게무샤(影武者)’, 즉 ‘그림자 무사’로 불렀다. 가게무샤는 영주와 같은 옷을 입고 ‘칼·총알받이’ 역할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과 겨뤘던 다케다 신겐은 사후까지 가게무샤를 남겼다는 설도 있다. 그는 저격을 당하자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3년간 대역을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좀도둑이 대역으로 뽑혔지만, 가짜임이 탄로나면서 신겐 진영은 급속히 무너졌다.

가게무샤의 역사는 오래됐다. 한나라 장수 기신이 자신이 모시던 유방으로 위장해 항우에게 목숨을 잃었고, 고려 장군 신숭겸은 견훤 군사에게 포위되자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주군(主君) 대신 죽는 등 그 사례는 많다.

현대 들어 북한 김정일이 생전에 자신과 빼닮은 대역을 여럿 뒀다는 설이 있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처럼 언제 어디서 미군 폭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도 ‘김정일 가게무샤’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김달술 전 국정원 상임위원은 1970년대 초부터 남북회담에 대비해 김일성·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고 그들과 똑같이 사고하는 훈련을 했다. 특히 그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실시된 모의회담에서 김정일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효과는 컸다. 김정일이 실제 회담에서 민족자주 등 그가 모의회담 때 거론한 것과 거의 똑같은 질문을 해 남측 참석자들이 깜짝 놀랐던 일화가 있다. 지난해 작고한 그는 “30년 가까이 철저히 북한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어느 날 김정일 위원장이 된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고 한 바 있다.

미국 타블로이드 잡지 글로브가 지난 5월 6일~6월 5일 북한 김여정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빠 김정은을 살해했다고 지난 23일 보도해 주목을 끌었다. 김정은 대역설도 제기했다. 지난달 9일 정권수립 73주년 열병식에 살이 확 빠진 모습으로 등장한 김정은이 실은 가게무샤였다는 주장이다. 지난해부터 김정은 건강이상설과 사망설이 흘러나왔지만, 국정원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분명한 것은 ‘가게무샤’설이 나오는 자체가 김정은 체제가 불안하다는 증거다. 모든 시나리오를 대비해 둬야 할 것 같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