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전자랜드에 있는 LP샵 필레코드에 다양한 LP가 진열돼있다. /허문찬 기자
서울 용산 전자랜드에 있는 LP샵 필레코드에 다양한 LP가 진열돼있다. /허문찬 기자
컴퓨터 관련 장비가 즐비한 서울 용산 전자랜드. 어지러운 전자기기 작동음 사이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이 흐른다. LP숍 ‘필레코드’에서 나오는 소리다. 가게 중앙에 놓인 1920년대 에디슨 턴테이블이 쉼없이 돌아간다. LP가 빼곡한 진열장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1980년대를 풍미한 청년 조용필의 사진이 담긴 LP 표지가 눈길을 끈다. 음반 수집가들은 진열장을 오가며 LP 상태를 세심하게 살핀다. 앨범 겉면을 훑어보고선 판을 꺼내 품질을 확인하는 시선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롭다.

필레코드는 음반 수집가들 사이에서 ‘보물창고’로 통한다. 이곳에 있는 LP는 20여만 장. 김원식 필레코드 대표가 40년 동안 수집한 음반들이다. 김 대표가 처음부터 음반 판매점을 운영하려던 건 아니었다. 1970년대 서울 종로 3가에서 DJ로 활동하며 취미로 모으던 LP가 쌓여 어느덧 20만 장이 됐다. 지금도 수집을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매년 영국에서 열리는 음반산업박람회를 찾아갔고, 음반 수집가들이 유산으로 남긴 LP들을 사들였다.

스마트폰 화면 몇 번 누르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왜 LP를 모을까.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로 치부하기엔 감상법이 불편하다. 약 30분마다 음반을 뒤집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LP판과 턴테이블 바늘을 꾸준히 청소해줘야 한다. 수고스러운 과정을 감수하면서도 수집가들이 LP를 모으는 이유는 ‘희소성’ 때문이다.

수집가들이 보통 모으는 LP의 양은 5000여 장. 감상하려면 수천 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쉽사리 재생하지도 않는다. LP판이 훼손될까 걱정해서다. 《레코드의 비밀》을 쓴 곽영호 작가는 “오래된 LP를 무분별하게 재생하는 건 고려청자에 술을 담아 마시는 행위와 비슷하다”며 “다시 구하고 싶어도 찾기 힘든 음반은 문화유산과 가치가 맞먹는다”고 했다.

수집가들은 감상보다 수집 자체에 희열을 느낀다. 이 때문에 최근 재발매하는 LP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현재 구하기 어려운 중고 LP를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7000여 장을 수집한 김준형 음악평론가는 “옛날 판을 복제해도 원본과 소리가 다르다”며 “같은 음반이라도 음질 수준을 고려하면 초판의 소장 가치가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과언은 아니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LP의 품질이 떨어졌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음반 제작사들이 LP 제작 원가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원유 가격이 치솟자 원재료인 플라스틱도 비싸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LP 두께는 점점 얇아지고 무게는 줄었다. 음반에 담긴 음향 수준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곽 작가는 “옛날에 나온 LP는 ‘팬케이크’라고 불릴 정도로 두꺼웠다”며 “CD가 등장한 뒤 녹음 방식이 전부 디지털로 전환됐다. 요즘 나온 음반으로는 아날로그 감성을 누리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1980년대 이전에 나온 LP라도 제작연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LP를 제작하는 원판인 ‘스탬퍼’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탬퍼 하나로 최대 1000장 정도의 LP를 찍어낼 수 있다. 음반 녹음 직후 제작한 스탬퍼로 찍어낸 LP가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제작한 국가별로도 소리가 천차만별이라 LP를 고를 때 국적도 확인해야 한다. 오히려 국내 제작 음반이 높게 평가받기도 한다. 스탬퍼를 자체 제작한 일본과 달리 국내 음반사들은 유럽에서 스탬퍼를 직접 수입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