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처리장치(GPU) 전문기업 미국 엔비디아가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를 제치고 반도체 기업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올랐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미래 가치를 인정받은 덕분으로 풀이된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구조적인 성장세보다는 경쟁 심화와 세계적인 부품 부족에 따른 스마트폰 업체들의 주문 감소 등이 부각되면서 시총 1위 자리에서 내려오게 됐다. 업계에선 엔비디아의 주가 강세가 상당 기간 이어지면서 시총 1위를 지킬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최근 한 달 새 주가 18% 급등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26일 종가 기준 엔비디아의 시총은 6179억2000만달러로 전날(5791억5000만달러) 대비 약 6.7% 늘었다. 이날 TSMC의 시총은 5921억4000만달러로 집계됐다. TSMC는 반도체 시총 세계 1위 자리를 지난해 7월 이후 약 1년3개월 만에 엔비디아에 내줬다.

27일(현지시간)에도 엔비디아의 시총은 6111억달러, TSMC의 시총은 5898억6000만달러를 기록해 순위를 유지했다. 삼성전자(4043억9000만달러) ASML(3310억7000만달러) 브로드컴(2153억2000만달러) 인텔(1947억6000만달러)이 뒤를 이었다. 최근 반도체 업종의 전반적인 주가 부진에도 엔비디아 주가는 꿋꿋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5일간 10.6%, 한 달 동안은 18.1% 상승했다.

페이스북 AI 투자 확대 수혜주

엔비디아가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성이 부각된 영향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세계 AI 반도체 시장 규모는 올해 181억달러에서 2023년엔 343억달러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엔비디아는 ‘GPGPU’란 제품을 앞세워 세계 AI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다. 엔비디아가 단순한 계산에 능해 AI의 딥러닝(데이터를 반복 학습하는 것)에 적합한 GPU를 업그레이드한 게 GPGPU다.

이런 상황에서 ‘메타버스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페이스북이 25일 열린 3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내년 AI 등에 최대 34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게 엔비디아 주가 상승에 촉매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페이스북 AI 투자 확대의 수혜주로 엔비디아를 꼽고 있다.

신사업에 대한 성장성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엔비디아는 메타버스 서비스인 ‘옴니버스’를 내놨다. 디자이너들이 3차원(3D) 이미지나 영상을 함께 만드는 온라인 공간이다. 건축설계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어도비, 블렌더 같은 유명 3D 제작 툴 업체들도 합류했다. 옴니버스를 활용하려면 구독을 해야 하는데 이때 엔비디아의 RTX 그래픽카드가 필요하다.

클라우드게이밍 서비스인 ‘지포스나우’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게이머들이 한 달에 10달러 정도를 내면 엔비디아의 최고급 서버에서 운영하는 최고 사양 그래픽 게임을 스마트폰 등으로 즐기는 방식이다.

다음달 17일 발표할 예정인 2022회계연도 3분기(8~10월) 실적 관련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증권사들이 추정한 3분기 주당순이익(EPS) 평균값은 1.1달러다. 작년 3분기 0.73달러, 전분기 1.04달러보다 각각 50.7%, 5.8% 늘어난 수치다.

ARM 인수는 ‘불확실’

리스크 요인도 없지 않다. 애플, 테슬라 등 비(非)반도체 기업들의 칩 자체 개발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애플은 최근 공개한 노트북 ‘맥북 프로’에 자체 개발 통합칩셋(SoC)인 ‘M1 프로’와 ‘M1 맥스’를 장착한다고 발표했다. 엔비디아의 주력 제품인 GPU도 자체 개발한 애플은 “다른 제품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테슬라는 AI 반도체인 ‘D1’을 공개하고 내년 가동 예정인 슈퍼컴퓨터 ‘도조’에 적용할 계획이다.

영국 반도체 기업 ARM 인수합병(M&A)에 속도를 못 내고 있는 것도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엔비디아는 400억달러에 ARM을 인수하기로 했지만 M&A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각국 경쟁당국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날 유럽연합(EU) 경쟁위원회는 두 회사의 M&A에 대해 4개월간 조사할 것이라며 “M&A가 ARM의 중립적인 디자인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하고 제품 가격 인상, 선택권과 혁신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쟁당국이 M&A를 승인하지 않으면 엔비디아는 ARM에 해지 수수료를 내고 인수 계약을 포기해야 한다.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