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욱 한국신용평가 평가정책본부 실장
최형욱 한국신용평가 평가정책본부 실장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작년부터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의 신용등급이 강등되고 있다. 혹은 향후 신용등급 강등을 예고하는 부정적 등급전망을 달게 된 경우가 늘고 있다. 국가 신용등급은 국채의 발행수익률 뿐만 아니라 국가에 속한 모든 은행, 기업 등의 해외자금 조달 금리나 발행 조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국가 신용등급은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의 신용도다. 국채에 대한 만기 상환 의무를 지는 각국 중앙정부들의 재정안정성 수준에 따라 상대적인 서열을 매겨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국가 신용등급이란 것이 몇몇 대표적인 지표로 드러나는 재정 건전성이나 외채상환 능력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기도 한다. 언뜻 국가간 매겨 놓은 서열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무디스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처럼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이 국가 신용등급을 결정할 때 고려하는 요소들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다양한 것들이 있다. 재정안정성 못지않게, 예컨대 특정 국가의 산업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국제 경쟁력이 있는지, 국가의 민주주의나 법치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등이 중요할 때가 있다. 어쩌면 국가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정부의 재정지표는 결국 해당 국가 전반의 경제력이나 산업다양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결과물 또는 부산물이다. 경제력과 산업경쟁력은 국가시스템 전반의 효율성이 뒷받침돼야 안정적으로 축적되고 유지된다. 다시 말하자면, 본원적인 그리고 장기적 관점의 정부 재정안정성과 신뢰도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경제기반이나 제반 제도가 얼마나 안정적인지에 달렸다. 쉽게 말해 얼마나 ‘덜 프래질(Fragile)하냐’의 관점인 셈이다.

한국을 살펴보자. 국회에서 재정 책임자와 위정자들이 ‘국가의 곳간 형편과 국가 신용도 우려’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은 AA 수준의 매우 높은 신용도를 보이고 있다. 중기적인 신용도 전망도 안정적(Stable)으로 유지되고 있다. 부도위험 지표 수준도 역사적으로 가장 낮게 형성돼 있다.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많은 재정지출이 소요돼 정부의 재정부담이 높아지고 내수 기업들과 소상공인들의 경영난이 발생하고는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선방하고 있다고 평가가 많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좌절과 희생을 치르면서 현재의 민주화를 이뤘다. 법치주의, 제반 국가시스템의 효율성과 투명성 측면에서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다양한 산업에서 국제 경쟁력이 있는 기업들이 포진해 있다. 이로부터 안정적 세수가 나와 자연스럽게 정부의 재정건전성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밑바탕이 돼 전례 없는 코로나19 확산 속에서도 정부의 위기대응력이 유연하게 발휘되고 있다. 사회기반과 성장잠재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필요한 재정지출이 적절히 이뤄지고도 있다. 이를 토대로 비교적 단기간 내 재정안정성이 가시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예상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안티프래질(Anti-Fragile)’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래브가 만든 용어인 ‘안티프래질‘은 플래질의 반대를 의미한다. 일종의 강건함이다. 하지만 강건함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작은 실패와 스트레스 경험을 축적한 결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강화됐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 신용등급 평가방법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회복탄력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근래 중국과 홍콩은 부동산재벌 헝다그룹의 파산 이슈로 혼란스럽다. 헝다그룹 이슈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수십년 전 한국이 한창 개발 붐을 앞세워 고도 성장하던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헝다그룹 사태가 주는 많은 시사점이 있지만, 일단 국가 신용등급 관점의 정부 효율성 측면에서 보자면 중국 정부의 정책이 예측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의적이며 민간과 경제에 대한 지나친 개입과 비효율이 만연해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과거 정부 정책이 지금의 헝다그룹을 키웠고 또한 현재의 바뀐 정부 정책이 다시 헝다그룹을 좌초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전력난 이슈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헝다그룹 사태로 인해 중국은 시스템 리스크까진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사회·경제적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여파가 진정되고 이로부터 배움을 얻기까지 또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이 같은 실패와 극복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중국도 점차 안티프래질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회주의국가가 갖는 한계와 체제적 특성 때문에 다소 멀고 험난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불확실성, 무질서함, 그리고 가변성. 신용평가 연구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특성들이다. 그것이 사회, 경제, 산업 등 무엇이든지 개별 분야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런 프래질이 전체 시스템에 전가되지 않도록 절연·보호돼 있어야 한다. 나아가 개별 프래질들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전체 시스템의 안티프래질로 통합 및 축적돼 가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 국가 신용등급 관점의 높은 신용도로 이어질 수 있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게 되면서 국가 간 신용도 차별화가 이뤄질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산업 지형의 흥미로운 변화가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의 산업 경쟁력 관점에서 안티프래질을 위한 조건들을 생각해 볼만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