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오래 버티는 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은 젊은 세대에 긴 여운을 남겼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으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천직’이 있고, 그것을 찾으면 저절로 성공한다는 이른바 ‘열정론’이 재조명됐다. “맞아! 열정을 따라야 해. 인생은 그러라고 있는 거야”라며 무릎을 친 기억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2년 전 출간된 《열정의 배신》의 저자(칼 뉴포트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이런 열정론이 틀렸을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비판했다. 새로운 도전으로 성공신화를 쓴 사람도 물론 있지만, 무모한 시도로 실패한 사람 또한 적잖게 봤다는 것이다. 그는 ‘1만 시간 법칙’처럼 오래 몸담은 분야에서 꾸준히 실력을 키워가면 차별화된 경쟁력 구축은 물론, 없던 열정도 생긴다고 주장했다.

한때 화제였던 ‘열정론’ 논쟁이 이제 막 인생 항로를 시작한 20~30대들에겐 사치처럼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취업절벽과 고용 불안 탓에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버는 세대’라는 자조(自嘲)에다 ‘번아웃(burn-out·탈진)’ 지경이라는 호소도 많다. 고속성장기를 보낸 부모 세대로부터 “투정 부린다”는 소리마저 들으니, 더 힘들 것이다. 이미 번아웃된 이들에게 열정을 가지라고 충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계 미국인 LPGA 선수 대니엘 강(29)의 한경 인터뷰(10월 30일자 A21면)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현 세계랭킹 10위에 올라 있고, 10위권 선수 가운데 박인비(33)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그는 “골프를 인생 최우선으로 생각한 적 없고, 항상 가족이 먼저였다. 그래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열정이 매몰되지 않게 골프와 삶 사이의 적당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언급이 인상적이다. ‘엘리트 강박’이 없는 서구사회에선 당연한 말이지만,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어떤 목표든 올인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는 적지 않은 울림이 있다.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또는 번아웃되지 않고 열정의 불씨를 간직하기 위해 ‘오래 버티는 힘’은 소중하다. 직업, 재테크, 각종 인생의 선택에서 잘 풀릴 것이란 긍정적 마인드와 자기암시, 종교적 신심과 가족 사랑, 주위 응원까지 자신만의 동력을 찾는 게 우선일 것이다. 기성세대도 마찬가지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