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질투와 복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거는 ‘과연 우리 사회에 용서와 화해가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에 긍정적인 답을 준 기회가 된 거 같다. 우리 정치판이 복수만이 활개 치는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다. 우리처럼 정치가 삶의 중심이 돼버린 사회에서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복수의 대물림을 보면서 국민도 배우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대물림은 제발 그만 보고 싶은 게 절실한 심정이다. 그러려면 인간의 감정 가운데 가장 사악하고 강렬한 감정인 질투와 증오를 순화시켜야 한다. 사촌이 땅을 샀다고 했을 때 솔직히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픈 배를 잘 다스릴 수 있어야 성숙한 인간이고 민주공화국 시민의 자격이 있다.

질투와 증오를 악용한 대표적 인간이 히틀러다. 그와 반대로 심중에 질투도 증오도 없었던 특이한 정치인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처칠은 “질투는 나쁜 감정 중에서도 가장 비생산적인 감정”이라고 말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어떤 동료는 처칠이 “오늘이라는 회계장부에 적힌 내용을 내일이라는 계정에 옮겨 적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거국 연립정부를 이끈 처칠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당분간 연립정부를 더 유지하자고 노동당에 제안했다. 종전 후 국민 역량을 총 결집해 재건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고 믿은 노동당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노동당에 정권을 내줬고 국가 재건과 관련해 의회에서 논쟁을 벌였지만, 그와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자주 만나 식사를 함께하는 사이좋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망국과 식민지 경험, 분단과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 때문에 영국과 같은 품격 있는 정치인들이 산출되기 어려우리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퇴보의 징후가 보인다는 점이다. 정치인 수준이 한심하다면 국민 수준도 나을 게 없다. 얼마 전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 번 양보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대장동 개발에 어느 정도 연루됐는지는 수사가 진행 중이니 말을 삼간다 해도, 그의 악명 높은 욕설은 온 국민이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난 추석 때 모인 인척 가운데 “그처럼 화끈하게 욕하는 걸 보니 일도 화끈하게 잘하겠다”는 사람이 있더라며 당혹해하고 창피해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화끈하게 욕 잘하는’ 대통령도 문제지만 그런 대통령을 원하는 국민도 세계인들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한민국 수준은 아니다.

어느 지인은 이 후보가 시정잡배 같아 싫다고 말한다. 차라리 시정잡배라면 이처럼 불안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대통령이 돼 만들 나라는 또다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가 될 것 같다. 대장동 개발과 같은 사건이 다시 터지지는 않겠지만 우리 국민이 그토록 원하는 대통합은 이재명 정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현 정권보다 더한 정도로 없는 자와 있는 자로 갈리고 서로에게 증오와 시기심을 느낄 것 같다. 만약 국민 기본소득과 250만 호 주택 제공, 음식점 총량제 같은 뜬금없는 정책을 밀어붙인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균형은 신체와 정신 모두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 아기들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얼굴은 잘생겼는지 여부를 떠나 좌우 균형 잡힌 얼굴이라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귓속 기관이 작동하지 않을 때의 어지럼증을 겪어본 사람은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 과정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진영논리를 떠나 균형 감각을 찾아야 할 때다. 정치인들의 수준을 높여야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민도 신중하게 사리분별을 해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은 “위대한 국민이 위대한 정부를 만든다. 그 역이 아니다”고 설파했다. 마지막으로 처칠의 명언 한마디를 다시 기억하자. “정치인은 항상 장기적 안목에서 나라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 대선 후보들 가운데 그런 정치인이 있는지, 심히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