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美·北 설득 못하면서 '종전선언' 하겠다는 정부
“양 장관은 종전선언 문제를 포함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조기 재가동을 위한 협력 방안에 솔직하고 심도 깊은 의견을 교환했다.”

외교부는 지난달 30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다음날 한·미 외교장관 회담 뒤에 낸 입장도 비슷했다. ‘의견 교환’ 앞에 붙은 수식어만 ‘솔직하고 심도 깊은’ 대신 ‘진지한’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외교당국 발표에선 ‘종전선언’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중국은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노력과 제안을 지지한다”며 종전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라도 남겼지만 미국은 “두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강조했다”고 언급했을 뿐이다.

한국의 ‘외교 시계’는 지난 9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이후 갑자기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이례적으로 문 대통령 순방에 동행했고, 문 대통령은 바티칸에서 교황을 만나 방북을 제안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초청받으면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교황의 말을 전하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반가운 소식”이라고 화답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 달여 만에 미·중·일·러 등 주변 4강의 외교 수장 모두와 대면 회담을 했다. 특히 한·미 간엔 외교장관뿐 아니라 정보수장, 국가안보실장, 북핵수석대표 등 외교·안보라인 각급에서 회동이 이뤄졌다.

문제는 종전선언의 열쇠를 쥔 미국과 북한 모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종전선언 제안에 “지금 때가 적절한지, 모든 조건이 이런 논의를 해보는 데 만족(충족)되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각각의 단계에서 정확한 순서와 시기, 조건에 대해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며 종전선언에 대한 한·미 간 시각차를 드러냈다.

이에 외교부는 다음날 “시각차에 관한 부분은 외교적 협의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며 “(미국의) 발언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미 간 이견은 가린 채 정부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꼴이다.

북한은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제안한 지난 9월에만 네 차례 미사일 도발을 했다. 지난달에는 2년 만에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까지 쐈다. 비핵화는커녕 무력 도발을 이어가며 대화 제의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종전선언에만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기엔 한국이 처한 외교 현실이 너무 냉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