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뿌리내린 강인한 생명력…편견에 맞선 그녀의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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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명작 유레카
조지아 오키프 '페데르날이 있는 사슴 해골'
"짐승의 뼈는 사막의 아름다운 꽃"
고독하지만 독립적인 삶을 살아온
오키프의 자의식이 스며든 초상화
남성 중심의 예술 권력에 도전
'성차별의 미술史'를 바꾼 거장으로
조지아 오키프 '페데르날이 있는 사슴 해골'
"짐승의 뼈는 사막의 아름다운 꽃"
고독하지만 독립적인 삶을 살아온
오키프의 자의식이 스며든 초상화
남성 중심의 예술 권력에 도전
'성차별의 미술史'를 바꾼 거장으로
유리천장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제용어다.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로 인해 고위직으로 승진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불후의 명성을 얻은 여성 화가가 있다. 20세기 미국 미술의 전설이자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숭배받는 조지아 오키프(1887~1986년)다.오키프는 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민화가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예술가다. 미국 최고의 미술관 메트로폴리탄이 선정한 14명의 미국 거장 명단에 포함된 유일한 여성 작가였으며, 1946년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1962년 미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1977년 미국 최고의 영예인 자유훈장에 이어 1985년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예술적 업적을 기리는 미술관을 가진 최초의 미국 여성 작가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1997년 미국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 그의 이름을 딴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설립됐다.
오키프는 예술적 창조성이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시절에 성차별의 미술사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현대 사진의 거장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원래 성을 사용할 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았다.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편견의 시대에 맞선 오키프에게 “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다”는 찬사를 바쳤다. 뉴멕시코주 고스트랜치의 주변 풍경을 담은 ‘페데르날(Pedernal)이 있는 사슴 해골’(1936)은 오키프가 미술계의 성차별을 극복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키프는 1929년께부터 매년 여름 뉴멕시코로 장기간 여행을 떠나 원초적 생명력을 지닌 사막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1946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49년, 62세로 고스트랜치에 영구히 정착했다.
고스트랜치 인근 마을 아비키우에의 낡은 집을 수리해 작업실을 마련하고 여름에는 고스트랜치, 겨울엔 아비키우에서 은둔하며 창작에만 몰두했다. 이 작품은 뉴멕시코의 자연 풍경이 영감의 원천이자 유리천장을 깨는 용기의 근원이었다고 말해준다. 그만큼 주제의식이 독창적이고, 표현 기법도 실험적이다. 먼저 대담하게도 동물의 두개골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화면 중앙에 우아하게 구부러진 뿔을 단 사슴의 두개골이 죽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오키프는 사막의 자연물을 수집해 작품 소재로 즐겨 사용했는데, 특히 뼈에 깊이 매혹됐다. 그는 뼈를 사막의 아름다운 꽃이자 삶과 죽음의 상징물로 여겼다. 이는 “뼈들은 내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살아 움직이는 동물보다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그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화면 구성 능력도 탁월하다. 두개골을 클로즈업한 독특한 구도를 취했는데 이로 인해 뼈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한편으론 수직의 뼈와 나무, 수평의 산을 대비해 조화와 균형을 이뤄냈다. 카메라 렌즈로 대상을 보는 듯한 접사촬영 기법 효과도 활용했다. 뼈의 눈구멍과 관객의 눈이 마주하고, 뼈의 눈구멍을 통해 파란 하늘과 페데르날산이 보이도록 연출했다. 오키프는 스페인어로 ‘부싯돌 언덕’이라는 뜻의, 꼭대기가 평평한 독특한 형태를 한 페데르날산에 깊이 매료돼 많은 작품에 담았다. 그에게 페데르날산은 신성하고 장엄한 존재이자 영적 기도의 대상이었다.
오키프는 1986년 3월 6일, 98세로 샌타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도 추모식도 거행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페데르날산의 정상에 뿌려졌다. 그토록 사랑한 뉴멕시코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 페데르날과 하나가 된 것이다.
신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사막 풍경화는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고독을 대가로 치렀던 오키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오키프의 어록 중 “남자들은 나를 최고의 여성 화가라고 평가 절하하지만 내가 보기에 나는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는 명언이 있다.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예술적 역량으로만 평가하라는 뜻이다. 그런 자부심이 미술계의 소외계층인 여성 화가로서 남성들과 경쟁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의 조지 킹 관장은 오키프가 국민적 사랑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예술가가 뉴멕시코와 샌타페이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곳은 당연히 오키프의 영토다. 미국인들은 오키프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강인한 의지와 독립정신을 좋아한다.”
오키프는 예술적 창조성이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시절에 성차별의 미술사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현대 사진의 거장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원래 성을 사용할 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인생을 살았다.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편견의 시대에 맞선 오키프에게 “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힘, 해방, 자유다”는 찬사를 바쳤다. 뉴멕시코주 고스트랜치의 주변 풍경을 담은 ‘페데르날(Pedernal)이 있는 사슴 해골’(1936)은 오키프가 미술계의 성차별을 극복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키프는 1929년께부터 매년 여름 뉴멕시코로 장기간 여행을 떠나 원초적 생명력을 지닌 사막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1946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49년, 62세로 고스트랜치에 영구히 정착했다.
고스트랜치 인근 마을 아비키우에의 낡은 집을 수리해 작업실을 마련하고 여름에는 고스트랜치, 겨울엔 아비키우에서 은둔하며 창작에만 몰두했다. 이 작품은 뉴멕시코의 자연 풍경이 영감의 원천이자 유리천장을 깨는 용기의 근원이었다고 말해준다. 그만큼 주제의식이 독창적이고, 표현 기법도 실험적이다. 먼저 대담하게도 동물의 두개골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화면 중앙에 우아하게 구부러진 뿔을 단 사슴의 두개골이 죽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오키프는 사막의 자연물을 수집해 작품 소재로 즐겨 사용했는데, 특히 뼈에 깊이 매혹됐다. 그는 뼈를 사막의 아름다운 꽃이자 삶과 죽음의 상징물로 여겼다. 이는 “뼈들은 내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살아 움직이는 동물보다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그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화면 구성 능력도 탁월하다. 두개골을 클로즈업한 독특한 구도를 취했는데 이로 인해 뼈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한편으론 수직의 뼈와 나무, 수평의 산을 대비해 조화와 균형을 이뤄냈다. 카메라 렌즈로 대상을 보는 듯한 접사촬영 기법 효과도 활용했다. 뼈의 눈구멍과 관객의 눈이 마주하고, 뼈의 눈구멍을 통해 파란 하늘과 페데르날산이 보이도록 연출했다. 오키프는 스페인어로 ‘부싯돌 언덕’이라는 뜻의, 꼭대기가 평평한 독특한 형태를 한 페데르날산에 깊이 매료돼 많은 작품에 담았다. 그에게 페데르날산은 신성하고 장엄한 존재이자 영적 기도의 대상이었다.
오키프는 1986년 3월 6일, 98세로 샌타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도 추모식도 거행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페데르날산의 정상에 뿌려졌다. 그토록 사랑한 뉴멕시코의 자연 속으로 돌아가 페데르날과 하나가 된 것이다.
신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사막 풍경화는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고독을 대가로 치렀던 오키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오키프의 어록 중 “남자들은 나를 최고의 여성 화가라고 평가 절하하지만 내가 보기에 나는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는 명언이 있다.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예술적 역량으로만 평가하라는 뜻이다. 그런 자부심이 미술계의 소외계층인 여성 화가로서 남성들과 경쟁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의 조지 킹 관장은 오키프가 국민적 사랑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예술가가 뉴멕시코와 샌타페이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곳은 당연히 오키프의 영토다. 미국인들은 오키프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강인한 의지와 독립정신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