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패싸움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조선인 학생을 구타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1929년 11월 3일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학생을 구금했다.
시위 소식을 들은 신간회에서는 광주 사회단체들과 함께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해 학생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했다. 이들은 11월 11일 격문을 살포해 11월 12일 광주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 보장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광주 지역 소식이 알려지며 시위 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졌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12월 9일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12월 13일까지 계속됐다. 일제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학교를 폐쇄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의 불꽃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고 1월 18일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이 없어서 고립 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약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됐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기념했다. 하지만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청소년이 일제 탄압에 맞서 싸웠던 기념일인 만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꼭 기억해야 하는 기념일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서 ‘제92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10월 30일, 11월 6일 오프라인 방식으로 역사 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특강에서는 학생독립운동 전개 과정 및 결과, 역사적 의의 등을 살펴봤다.
소현정 생글기자(염경중학교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