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의 식당이나 카페에선 종종 유명 기업인을 볼 수 있다. 샌드위치가 맛있기로 유명한 멘로파크의 한 커피바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자주 온다. 스탠퍼드대에서 멀지 않은 팰로앨토의 유니버시티애비뉴 식당가에는 팀 쿡 애플 CEO의 단골 베트남 식당, 마크 저커버그 메타(옛 페이스북) CEO가 즐겨 찾는 맥주집 등이 있다. 한 지인은 “최근 점심을 먹는데 도어대시(미국 1위 배달업체) 창업자가 식당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유명 인사들의 단골식당은 한국의 호텔 레스토랑처럼 한 끼에 10만원, 20만원 하는 곳도 아니다.

“여기에선 슬리퍼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함부로 무시하지 않아요.”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 광역도시권)에 본사가 있는 유명 기술기업에 다니는 한 직장인의 얘기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인도인, 종이상자에 음식을 담아 가는 중국인 등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억만장자급 부자가 부지기수라는 이유에서다. 한 스타트업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에선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글로벌 스타트업 직원들이 같은 빌딩 옆 사무실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것을 보면 ‘작은 성공’에 만족할 때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는 얘기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경기 성남 판교와 쿠팡, 배달의민족 본사가 있는 서울 잠실 등은 어떨까. 한국판 빅테크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에 다니는 지인들에게 ‘이해진, 김범수, 김범석 등 창업자들이 즐겨 찾는다는 식당이나 술집을 아냐’고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답했다. ‘본사 몇 층에 VIP만의 전용 공간이 있다더라’, ‘우리 의장님은 평소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등의 얘기만 돌아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이다. 기자들도 한국판 빅테크 창업자를 접하는 게 쉽지 않다. 1년에 한두 번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그나마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의원들에게 질책받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규제를 풀어달라”며 앓는 소리는 하지만 ‘번뜩임’은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 빅테크 창업자들의 폐쇄성은 이름 뒤에 흔히 붙는 ‘의장’ 등의 단어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는 게 스타트업 업계의 한결같은 평가다. 주요 경영 판단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법적 책임을 지는 ‘대표(CEO)’라는 타이틀을 단 인물은 찾기 어렵다. 업계에선 ‘회장’이란 단어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CEO 타이틀을 갖는 것은 싫어서 생각해낸 게 ‘의장’이란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CEO 위에 막후 실력자가 있는 ‘옥상옥’ 경영 구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이 늘어나고 직원들의 혼란이 커진다는 비판도 있다.

판교의 의장님들이 두문불출하는 사이 실리콘밸리의 ‘진짜 빅테크’ 창업자 겸 대표들은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는 우주를 향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저커버그는 사명까지 바꾸고 신사업을 향한 닻을 올렸다. 현상 유지만 해도 2~3대는 편하게 먹고 살 텐데 만족할 줄 모르는 기업인의 ‘야성(野性)’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외부와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애플의 팀 쿡,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등 유명 CEO들은 다양한 콘퍼런스에 등장해 한두 시간 회사의 비전을 공개하고 주주들을 설득한다. 설화로 종종 곤욕을 치르는 머스크도 SNS를 통해 전 세계의 테슬라 팬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한다. 머스크는 SNS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듣고 나면 테슬라 직원들에게 검토를 지시한다고 한다. 소통의 순기능이다.

최근 만난 한 기업인은 “한국에서 빅테크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최근 수년간 ‘깜짝 놀랄 만한’ 사업이나 ‘미래 비전’을 제시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네카라쿠배가 몸집만 커진 ‘그저 그런 기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삼성 현대차 SK LG 같은 대기업이 혁신기업에 가까운 것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때 혁신의 상징이었던 판교의 의장님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