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 통해 엿본 제주 감귤의 역사·문화

제주의 가을은 감귤 빛으로 물든다.

[다시! 제주문화](23) 화폭에 담긴 제주 감귤…다른 사연 다른 시선
돌담 너머 짙푸른 잎 사이로 반짝이는 귤빛은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만큼이나 아름다운 색감을 연출한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또 그 속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 걸작으로 남은 '귤림풍악'
화공(畵工)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
조선 숙종 1702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이형상이 도내 각 고을을 순회한 모습과 행사 장면 등을 기록한 채색 화첩이다.

총 43면으로 이뤄진 탐라순력도 중 눈에 띄는 그림 하나가 바로 '귤림풍악'(橘林風樂)이다.

귤이 무르익을 무렵 제주목관아 망경루 후원 귤나무숲(橘林)에서 이형상 목사가 풍악을 즐기는 모습을 담았다.

길쭉한 대나무가 귤숲을 아름드리 감싸고 있고 주변에는 망경루와 귤림당, 병고, 교방이 자리 잡고 있다.

제주의 귤을 이처럼 화사하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작품 속 귤나무 한복판에 목사를 중심으로 그림을 확대해 보면 은은한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다시! 제주문화](23) 화폭에 담긴 제주 감귤…다른 사연 다른 시선
귤나무마다 노랗게 또는 붉게 익은 감귤은 마치 단풍이 물든 듯 따스하면서도 풍요롭다.

심지어 숲속 전체에 퍼진 향긋한 귤 내음까지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듯하다.

귤색이 울긋불긋 다양하게 표현된 건 나무마다 그 품종이 달랐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인 최열은 자신의 저서 '옛 그림으로 본 제주'에서 "조선 미술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이유는 '균등한 크기의 귤나무가 화폭 복판에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듯 전개됨으로써 화면 전체가 환하다.

또한 화폭 가장자리 몇 곳에 배치한 붉은 기둥의 전각이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 또한 빼어나다'며 '소재와 배치 면에서 오직 이 작품만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걸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가을 햇살을 받아 감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모습은 당시 다른 지역에선 보기 힘든 참으로 아름다운 절경이었을 것이다.

옛 선인들은 이 모습을 '귤림추색'이라 일컬으며 제주의 아름다운 10가지 경치인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건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나 허락됐을 뿐이다.

제주 백성들에게는 언감생심,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다시! 제주문화](23) 화폭에 담긴 제주 감귤…다른 사연 다른 시선
◇ 양반들에게만 허락된 '귤림추색'
제주감귤은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주요 공물로 관리됐다.

탐라순력도의 '감귤봉진'(柑橘封進)을 보자.
임오년(1702)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제주에서 재배된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한 작업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그림을 보면 망경루 앞뜰에서 여인들이 귤을 종류별로 나누고 있고, 이형상 목사는 연회각에 앉아 이를 일일이 점검하고 있다.

여인들 옆에는 남자들이 감귤을 보호하기 위한 나무통과 짚단을 만들고 있다.

바다 건너 한양까지 옮기는 과정에서 귤이 짓눌려 훼손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포장을 하는 셈이다.

당시 제주에는 귤을 재배하는 과원이 제주성 안 6곳을 비롯해 총 42곳이나 됐다.

진상하는 귤의 종류도 당금귤, 당유자, 유자, 금귤, 감자, 동정귤, 산귤, 등자귤, 청귤 등 다양했다.

그러나 과원에서 나오는 감귤 양이 충분하지 않자 관에서는 일반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해 관리했다.

귤이 열리자마자 그 수를 장부에 기록했다가 나중에 그 수량만큼 바치도록 귤나무 소유자에게 부과했다.

[다시! 제주문화](23) 화폭에 담긴 제주 감귤…다른 사연 다른 시선
과실이 해충 또는 비바람에 상해 못쓰게 되더라도 무조건 수량을 채우도록 강요하는 등 폐단이 심각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민가에서는 귤나무를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해서 나무에 끓는 물을 끼얹고 고사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보면 공물로 바치는 감귤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해마다 음력 11월이 되면 제주에서 공물로 보낸 감귤이 한양에 도착하곤 했는데, 때가 됐는데도 도착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문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음력 12월이 다 지나갈 무렵이 돼서야 공물이 도착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감귤꽃이 한창 피었을 때 태풍이 불어닥쳐 귤나무의 꽃이 모두 떨어져 버렸다.

제주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임금의 은택을 져버리는 일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죽을지라도 감귤만은 열리게 해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다.

다행스럽게도 세 그루의 나무에서 꽃이 다시 피었고 열매가 익자 늦었지만,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공물을 바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임금에 대한 충정으로 포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면에 백성들의 절박함, 처절함을 엿볼 수 있다.

감귤 열매와 죽음을 맞바꾸고 싶을 정도로 당시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했고, 공물을 바치지 못할 경우 자신들에게 닥칠 불이익과 고통이 두려웠던 것이다.

제주의 '귤림추색'은 누군가에겐 풍악을 즐기고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절경이지만, 수많은 백성에게는 '피눈물 나는 고통의 시기'였던 셈이다.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과 '감귤봉진' 두 그림을 통해 제주 감귤에 담긴 엇갈린 사연과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다시! 제주문화](23) 화폭에 담긴 제주 감귤…다른 사연 다른 시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