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국내 가야 금관 중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국보 ‘전 고령 금관’.  호암미술관 제공
현존하는 국내 가야 금관 중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국보 ‘전 고령 금관’. 호암미술관 제공
벽과 바닥, 천장까지 날것의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는 입구를 지나면 거대한 영상 작품이 시야를 메운다. 전시장 내부에는 그 흔한 가벽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자동차를 용접할 때 쓰는 공법으로 전시 케이스에 유물이 고정돼 있는가 하면 전시된 갑옷은 벌겋게 녹이 슬어 있고, 범종 아래에는 주조에 사용된 고운 모래(주물사)가 쌓여 있다. 1982년 개관 후 40년 가까이 고만고만한 고미술 전시만 거듭하며 ‘잊힌 미술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의 파격적인 변신이다.

지난달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야금: 위대한 지혜’전은 미술관 변모의 첫걸음과도 같은 전시다. 국보 5점, 보물 2점을 비롯해 총 45점의 걸작을 이전에 시도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펼쳐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금속 미술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때까지 호암미술관 전시가 정원(희원)을 보러 온 관광객들에게 눈요기를 시켜주는 정도였다면 앞으로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전시를 준비할 것”이라며 “국내외 미술 작가들이 리움에 작품을 걸고 싶어 하듯 호암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희망할 수 있도록 미술관의 수준을 확 높이겠다”고 말했다.

전시장의 노출 콘크리트는 전시를 위한 연출이 아니다. 이광배 호암미술관 책임큐레이터는 “리모델링을 위해 내장재를 다 뜯어낸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며 “금속 공예라는 주제도 노출 콘크리트 환경에 어울리는 전시를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과테말라 활화산을 담은 김수자 작가의 영상 작품 ‘대지의 공기’다. 생명과 금속 모두 물과 불, 흙과 바람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호암미술관이 미디어 작품을 건 것은 이례적이다.

전시는 이어지는 유물들을 통해 시대별로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의 문명과 삶을 짚는다. 청동기 시대 제사장이 목에 걸고 햇빛을 반사해 자신의 권위를 높였던 다뉴세문경에선 제정일치 사회가, 세형동검과 무기의 일종인 동모의 날카로운 날에서는 부족 간 투쟁이 읽힌다. 국내에 단 하나 있는 완전한 형태의 가야 금관은 한국 고대 야금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으로 사회 시스템의 발전과 강화된 왕권을 보여준다. 금관과 동검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다.

금제 귀걸이와 신라시대 금동관을 비롯한 모든 유물은 실제 사용됐던 높이에 맞게 전시 케이스에 고정됐다. 다뉴세문경은 목에 걸었을 때처럼 가슴께에, 무기는 팔꿈치 높이에 거는 식이다. 녹이 잔뜩 슨 채 전시돼 있는 가야 철제갑옷도 ‘깔끔하고 예쁜 것’ 위주로 전시해온 호암미술관에서 보기 어려웠던 광경이다. 미술관 관계자는 “국가 간 경쟁이 심화하면서 야금 기술의 중심이 장식에서 산업으로 변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철로 만든 고려시대 불상 ‘철조여래좌상’. 강인한 인상을 주지만 옆에서 보면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게 특징이다.  호암미술관 제공
철로 만든 고려시대 불상 ‘철조여래좌상’. 강인한 인상을 주지만 옆에서 보면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게 특징이다. 호암미술관 제공
이어지는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 불교 미술품이다. 고려시대 지방 호족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철로 제작한 철조여래좌상, 국보 제136호 금동용두보당(리움 소장) 등이 보인다. 6·25전쟁 때 부서진 신라시대 범종 ‘선림원종’을 원광식 주철장이 2005년 전통 방식으로 다시 만든 복원품도 전시장에 나와 있다. 밑에는 전시장과의 조화를 위해 주물사를 깔았고, 근처 스피커에서는 종이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마지막 전시 구역과 인근에는 여러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와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포진해 있다. 이우환의 ‘관계항’, 박석원의 ‘초토’, 존 배의 ‘원자의 갈비뼈’, 서도호의 ‘우리 나라’ 등은 금속의 특징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잡아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마지막은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포스코 제철소 모습을 영상에 담은 박경근의 ‘철의 꿈’이다. 전시 도입부에 있던 김수자 작가의 작품과 일종의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는데, 고대부터 쌓아 올린 한반도 야금 문화의 찬란한 성과를 뜻한다.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전경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전경
2층 등 미술관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 중인 만큼 전시장은 다소 어수선하다. 가벽이 없어 관람 순서도 헛갈린다. 하지만 탁월한 유물과 구성 수준 덕분에 이런 흠이 모두 덮이고, 내년 봄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공개할 대대적인 변신의 결과를 기대하게 만든다. 국내에서 한 손에 꼽히는 전통정원인 미술관 부속 정원 ‘희원(熙園)’의 가을 풍경이 빼어나다. 호수변에서는 리움에서 이동 설치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대한 조형 작품 ‘마망’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다음달 12일까지, 관람은 무료.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