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9년전 '박근혜표 예산' 소동 데자뷔
2012년 9월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선후보는 이명박 정부와 충돌했다. 예산안 편성을 놓고서다. 새누리당은 10조원 규모의 추경을 요구했고, 박 후보의 공약인 양육수당 확대, 반값 등록금 등을 위해 1조원 이상을 본예산에 더 편성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기획재정부가 난색을 표하자 박 후보는 이 대통령을 만나 직접 부탁했다. 그 후에도 박재완 기재부 장관은 “재정에는 한계가 있다”고 버텼다.

정치권의 압박이 거칠어지자 박 장관은 묘수를 짜냈다. 전직 장관들을 초청해 공개 행사를 열고 “재정 건전성을 정부의 힘만으로 지키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무책임한 재정 포퓰리즘에 대항할 수 있도록 지성인들이 국민적인 공감대를 만들어 달라”고 읍소하면서 대여론전을 펼쳤다.

현재 ‘이재명표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당·정 간 충돌은 9년 전 ‘박근혜표 예산 소동’의 데자뷔다. 이재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을 요구하고, 기재부는 “재정 여력이 없다”고 거부하는 모양새가 9년 전의 판박이다. 사족이지만 그때는 ‘친이친박’, 지금은 ‘친문비문’으로 여권 내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번엔 김부겸 국무총리까지 나섰다. 여권 내 합리적 소신파로 평가받는 김 총리는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막 뒤진다고 돈이 나오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고 이 후보를 점잖게 꾸짖으며 기재부에 힘을 실어줬다. 정부가 완고하게 버티자 여당은 꼼수를 꺼냈다. 올해 예상되는 초과세수를 내년에 걷어 연초에 1인당 20만~25만원씩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초과세수의 일정 부분은 공적자금 및 채무상환에 사용하도록 규정한 국가재정법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에 대해서도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일단 “정부가 자의적으로 세금납부를 유예하면 국세징수법에 저촉된다”고 물러서지 않고 있다.

9년 전 얘기를 꺼낸 건 여당 대선 후보들이 ‘집권 프리미엄’을 활용하려는 나쁜 버릇을 꼬집으려는 게 아니다. 그에 맞서는 ‘곳간지기’의 역할과 자세를 말하려는 것이다. 9년 전 박재완 장관은 박근혜 후보의 추경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정직한 한국인’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포퓰리즘에 맞설 배짱을 갖고 있는 관료”라고 극찬했다.

재정은 우리 경제의 마지막 보루이자 방파제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재정이 튼튼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이 뒤바뀐 사례를 수없이 봐왔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이 둑이 무너질 정도로 재정을 퍼부었다. 국가채무는 660조원(2017년)에서 1068조원(2022년)으로 불어난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5년간 한국의 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35개 선진국 가운데 1위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 씀씀이는 점점 커지고 있는 데 반해 성장둔화와 고령화·저출산으로 세금 낼 사람까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면 IMF의 경고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기재부는 문 정부 내내 “재정 파수꾼이 안 보인다”는 오명을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 여당과 각을 세우며 ‘결기’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법 57조는 ‘국회는 정부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액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기대어 예산을 증액하거나 새로운 항목을 신설하려는 것을 정부가 견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정부는 예산안 편성 권한을 갖고 있는 기재부를 가리킨다.

단적으로 홍 부총리가 사인을 하지 않으면 ‘이재명표 재난지원금’은 불가능하다. 지금 홍 부총리 외에도 예산통 관료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해 있다. 김 총리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구윤철 국무조정실장도 기재부에서 예산실장, 제2차관을 지낸 곳간지기였다. 헌법 57조를 가슴에 새기면서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