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줄무늬 비닐 커튼》(민음사·사진)을 펴냈다. 그에게 ‘수련의 시인’이란 별칭을 안겨준 역작 《수련》 이후 19년 만에 선보이는 연작시집이다.

2002년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인 《수련》을 분기점으로 채 시인은 ‘언어’를 인간의 정서적 활동에 동원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 물질성을 지닌 질료이자 신체를 가진 개체로 발견했다. 언어와 실재의 간극을 좁히는 실험을 이어온 그는 이번 시집에 29편의 연작시를 실었다. 의식이 자아의 경계를 잃은 뒤 소리뿐인 ‘말’이 돼 태어난 순간에서 그 대장정을 시작한다. 말은 물속에 떨어진 돌처럼 신체 내부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기포들이 떠오른다, 물속에/그걸 보고 있는 유리통 밖의/내가 아닌,/유영하는 기포가 나인, 그리고 또한/말이 나인데, 물속의 공기 방울/들리지 않는……” 시 ‘물속의 공기 방울’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서 자아는 유리통을 채운 물속에서 떠오르는 기포로 표현된다. 기포는 수면에 닿는 순간 터져 죽으며 소리, 즉 ‘말’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

이처럼 채 시인은 끝없이 자아를 해체하고 경계를 허물면서 오직 언어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세계를 그려낸다. 이번 시집은 오랜 시력(詩歷)을 다해 천착한 이 실험의 정점이자 시적 상상력의 극한을 펼쳐 보인다. 그는 시 ‘우뚝한 돌 그리고 구멍’에서 “씨 쓰기는 언어를 궁지로 몰아/쥐구멍에 빠뜨리는 일이다/언어 없이 사유할 수 있을까/시는 이미지로 사유하는 것/이때 언어는 덫에 걸리고/불구가 된 채/사라지지 않고 부스러기가 되어/그 물질성으로 이미지의 디테일을 구성한다”고 했다.

1988년 등단한 채 시인은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2000~2008년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지냈으며 서울예대 문예학부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