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늦가을, 고증식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늦가을, 고증식
늦가을


고증식

된서리 때려야
얼음골사과
제 맛이 돌듯

폭풍우 건너야
마침내
단풍잎 불붙듯

울음 없이
타오른 사랑이

사랑이랴

[태헌의 한역]
晩秋(만추)

嚴霜飛墮(엄상비타)
蘋果味鮮(빈과미선)
經風歷雨(경풍력우)
楓葉欲燃(풍엽욕연)
無啼有熱(무제유열)
愛戀何全(애련하전)

[주석]
* 晩秋(만추) : 늦가을.
嚴霜(엄상) : 된서리. / 飛墮(비타) : 날아 떨어지다. “때려야”를 문맥에 맞게 한역한 표현이다.
蘋果(빈과) : 사과. ※ 원시의 ‘얼음골’은 시화(詩化)시키지 못하였다. 얼음골은 밀양 얼음골을 가리킨다. / 味鮮(미선) : 맛이 좋다. 원시의 “제 맛이 돌듯”을 간략히 한역한 표현이다.
經風歷雨(경풍력우) : 바람을 겪고 비를 겪다, 풍우를 겪다. ※ 이 구절은 원시의 “폭풍우 건너야”를 다소 의역한 표현이다.
楓葉(풍엽) : 단풍잎. / 欲燃(욕연) : 불이 붙으려고 하다.
無啼(무제) : 울음이 없다. / 有熱(유열) : 뜨거움이 있다. 역자가 “타오른 사랑”의 ‘타오른’을 다소 의역한 표현이다.
愛戀(애련) : 사랑. / 何全(하전) : 어찌 온전하랴!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사랑이 / 사랑이랴”를 다소 의역한 표현이다.

[한역의 직역]
늦가을

된서리 날아 떨어져야
사과 맛이 좋아지고
바람 겪고 비 겪어야
단풍잎 불붙으려 하듯
울음 없이 뜨거움만 있다면
사랑이 어찌 온전하랴!

[한역노트]
이 시의 소개가 살짝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역자와 비슷하게 지금을 아직도 늦가을로 여기는 사람이 많겠지만, 초겨울로 간주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과 겨울이 갈마드는 이런 환절기가 되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 내지 생각까지도 헷갈리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되었지만 3연으로 이해해도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일단 제3연과 제4연을 한 연으로 묶어 전체를 3연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 각 연의 핵심적인 개념을 하나씩 뽑아 본다면 ‘맛’과 ‘빛’과 ‘정(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시 전체의 주지(主旨)를 단 한 단어로 개괄해 본다면 ‘담금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된서리가 사과의 ‘맛’을 깊게 하고, 비바람[폭풍우]이 단풍의 ‘빛’을 짙게 하듯, 울음, 곧 눈물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정’을 굳게 한다는 시의(詩意)가 담금질의 ‘효과’를 역설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생명체에게 있어 담금질이란 하늘이 부과하는 일종의 시련과 역경의 시간이다. 이 시련과 역경을 무사히 견디어냈을 때 아름다운 결과를 누리도록 하는 것 역시 하늘의 뜻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장애물이나 난관이 사라지면 행복해질 것으로 믿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으면 행복해지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회복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보라! 돈을 충분히 가진 자들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고, 건강미가 넘치는 자들 모두가 행복한 것도 아니다. 우선 내게 결여된 것만 채우면 당장은 행복해질 듯싶지만, 그것을 채우고 나면 또 다른 ‘바람’이 금세 고이기 마련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행복을 느끼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 시의 핵심어인 “사랑”으로 돌아가 보자. “울음 없이 타오른 사랑”이란 그 흔한 애태움도 안타까움도 눈물도 없이, 격정 하나로 순식간에 뜨거워진 사랑을 가리킨 말로 보인다. 땅이 빗물에 의해 서서히 다져지는 것과 같은 담금질의 과정도 없이, 그저 한 눈에 이끌린 마음 하나로 달아오른 사랑은 빨리 뜨거워졌던 만큼 빨리 식기 마련일 것이다.

역자가 이 시의 한역(漢譯)을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다보니 불현듯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옛날 대중가요가 떠올랐다. 이제 이 시에 대중가요와 같은 스타일의 제목을 붙인다면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시에 등장한 소품들인 사과와 단풍, 사랑은 물론 “타오른”에서 추론할 수 있는 ‘불’까지 모두 물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과가 된서리라는 ‘물’을 맞아야 맛이 들듯이, 매달린 나뭇잎에 ‘물’이 넉넉해야 단풍이 고운 빛을 내듯이, 사랑도 눈에서 흐르는 ‘물’이 있어야 굳어지기 때문이다. 또 불은 어떠한가? 물기가 없어 메마른 장작은 금방 타오르지만 화력(火力)이 다소 약하고 지속 시간도 짧다. 이에 반해 물기를 머금은 젖은 장작은 처음에는 연기만 풀썩거려도, 제대로 불이 붙기만 하면 마른 장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력에 지속 시간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니 이 ‘불’조차 때로 물이 필요한 것이다. 울음 없이 타오른 사랑이 냄비 같고 마른 장작 같다면, 눈물로 다져진 사랑은 가마솥 같고 젖은 장작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4연 9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역자는 6구의 사언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시어의 한역을 누락시키고, 몇몇 시어는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의역하였다. 이 한역시는 짝수 구에 압운하였으며 그 압운자는 ‘鮮(선)’·‘燃(연)’·‘全(전)’이다.

2021. 11. 16.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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