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고용안정 추가' 한은법 개정 신중해야
최근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목표에 기존의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외에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이와 관련된 법안들도 국회에 상정돼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황이 지속되며 자영업자들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당장 경제가 어렵다고 중앙은행법을 서둘러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신중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 사이에는 소위 필립스 곡선이라고 불리는 상충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가 좋아져 실업률이 하락할 때 대체로 물가는 상승하며, 반대로 경기가 나빠져 실업률이 높은 불황기에 물가상승률은 비교적 낮다는 얘기다. 이런 상충관계는 실업과 물가 두 개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는 힘든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간 상충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함께 인플레이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실업률이 크게 변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상대적으로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며, 지난 30년간 물가가 안정돼 인플레이션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이 그 근거다. 급기야는 화폐를 남발해도 결코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허무맹랑한 현대화폐이론(MMT)마저 등장하고, 이를 맹신하는 소리도 들린다.

물가와 고용 간 관계는 경제가 처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큰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인플레이션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불황의 요인이 민간 소비 및 투자의 위축과 같은 수요 측 충격일 경우, 전통적 금리정책을 통해 고용과 물가 중 하나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가 상승 등 공급 측에서 나쁜 충격이 발생할 경우, 여전히 경기는 침체된 상태에서 물가는 오르게 돼(흔히 스태그플레이션이라 불리는 현상), 두 가지 목표 중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더구나 최근 고용과 생산은 그 동조성이 약화되고 있다. 생산이 활기를 보여도 고용이 회복되지 않는 현상을 ‘고용 없는 경기회복(jobless recovery)’이라 지칭하며, 이는 중앙은행의 정책 타이밍을 더욱 어렵게 한다. 1990년대 말부터 관측되기 시작한 고용 없는 경기회복 원인에 관해 아직까지는 학계에서 명확한 이유를 내놓지 못하고 있지만, 정보기술(IT) 등을 필두로 한 생산 기술 변화가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경기 회복기 기업의 투자 확대가 노동을 절약하는 생산 방식을 채택하기에 과거에 비해 고용회복이 더디다는 가설이다.

고용, 생산, 물가의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경제는 끊임없이 다양한 충격에 노출돼 있고 시장을 통해 균형을 찾아간다. 충격의 종류와 그에 반응하는 과정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한다.

고용 안정이 법적인 목표로 명시돼 있지 않아도 중앙은행은 늘 고용과 생산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결정해 왔으며, 법제화한다고 목표 달성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의 한계로 인해 때로는 불황의 원인조차 규명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경직적인 우리 경제 현실에서 전통적 통화정책이 과연 고용 증대에 얼마나 효과적일지도 의문이다.

한국은행이 갖고 있는 정책 수단이 매우 제한돼 있는 상황에서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어려우며 때로는 상충되는 결과를 낳거나 주된 목표인 물가안정 및 금융안정을 저해할 우려도 있다. 나아가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을 저해할 수도 있다. 지난 30여 년간 기술 진보, 세계 경제 환경 변화로 인해 생산, 고용, 물가의 관계가 많은 구조적 변화를 겪었다. 특히 생산과 고용 사이의 안정적 관계가 약화된 상황과 매우 경직적인 우리나라 노동시장 구조를 감안할 때, 고용안정을 목표로 하는 통화정책은 최우선 과제인 물가안정은 물론 궁극적으로 실물경기 안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