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혁신, 조직 혁신, 혁신 성장…. 외환위기 직후 쓰이기 시작한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번역어 혁신이 2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말로 전락했다. 누구나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이 단어를 갖다 붙인 탓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쓴 《혁신의 미술관》은 미술사의 다양한 혁신 사례를 통해 ‘창조적 파괴’라는 혁신의 본래 의미를 일깨운다. “미술이야말로 남들과 비슷하게 그려서는 주목받을 수 없고 혁신을 거듭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세계”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연달아 등장하는 등 다양한 양식의 사조가 전개된 역사 자체가 화가들이 생존을 위해 단행한 혁신의 기록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고대 이집트·그리스 미술에 접목된 과학적 통찰부터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상업적 성공까지 전체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혁신 20여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미술사의 혁신에서 얻은 통찰을 방탄소년단(BTS)과 아이폰 등 다양한 현대의 혁신 사례와 함께 제시한 게 특징이다.

예컨대 기독교 미술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등지의 미술 전통을 받아들인 덕분에 인류의 찬란한 문화 유산이 될 수 있었다. 기원후 2세기까지만 해도 예수의 모습은 우상 숭배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유대교 전통 때문에 물고기나 닻 같은 픽토그램(그림문자)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아폴론 도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수염 난 철학자 같은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는 설명이다. ‘이교도적 표현’이라는 반발도 만만찮았지만 이런 변화는 유럽인의 마음속에 기독교가 안착하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문화적 혼융이 성공을 가져준다는 깨달음은 “BTS의 혁신 비결 중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조지 오웰, 헤르만 헤세 등 다양한 문화를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한 것”이라는 영국 가디언지의 평가와 일맥상통한다. 어린이들의 놀이와 해외 서바이벌 영화의 문법을 접목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흥행 등도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다양한 미술사적 혁신과 피부에 와닿는 최신 사례 등을 접하다 보면 혁신이라는 단어에 대한 피로감도 잠시 잊게 된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