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증오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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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쓰는 언어는 그의 정체
증오에도 윤리학 있는 듯 홀리고
사람들은 오히려 '대의증오' 원해
체제 전체를 구더기 끓게 하는
분노와 증오의 포퓰리즘 정치
정치학 아닌 정신병리학이 치유책
이응준 < 시인·소설가 >
증오에도 윤리학 있는 듯 홀리고
사람들은 오히려 '대의증오' 원해
체제 전체를 구더기 끓게 하는
분노와 증오의 포퓰리즘 정치
정치학 아닌 정신병리학이 치유책
이응준 < 시인·소설가 >
‘젊어서는 비극을 쓰고, 늙어서는 희극을 쓰고 싶다.’ 작가로서 이런 소망을 품은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죽음이 서늘한 청춘에는 비극에 몰입하고 지혜가 쌓인 만년(晩年)에는 그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작가를 동경했기 때문이다. 젊지도 않고 노인도 아닌 지금 돌이켜보건대, 영악한 계획이기는 했다 싶다.
소설가 고(故) 최인호의 수필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는 화가 이인성의 죽음을 다룬다. ‘조선의 고갱’ 이인성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천재다. 그의 고향 대구에서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라고 격려하는 게 상례였다고 한다. 수필의 줄거리는 이렇다. 술 취한 이인성은 자기 집이 있는 아현동 밤길을 걷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바로잡을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최인호는 이날을 1950년 11월 4일이 아니라 ‘해방 직후’로 착각하고 있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벌어져 드디어 ‘정판사(精版社) 사건’이 터진 서울의 밤 일곱 시께”라고 적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공산당원 7인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일을 가리킨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오류가 가끔 있고, 교정이 안 된 채로 계속 출판되기도 한다.
아무튼, 통행금지가 내려진 시각이라 치안대원은 이인성을 가로막고 신원을 요구한다. 이인성이 대답한다. “천재 이인성을 모르오?” 치안대원은 혹시 고위층 인물인가 싶어 그냥 보내준다. 경비소로 복귀한 치안대원이 동료에게 묻는다. “저기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아?” “알지.” “뭐 하는 사람이야?” “환쟁이지.” “뭐? 환쟁이?” 치안대원은 뛰쳐나가 이인성의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옷을 주워 입던 이인성은 치안대원이 쏜 총탄에 맞아 죽는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최인호는 이인성의 죽음을 바리새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예수의 죽음에 비유하며 분노한다. 이인성이 죽던 날 밤 그 사회의 모두가 이인성을 죽인 공범이라고 일갈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과 ‘불통’이 있다. 소통은 좋은 것이고 불통은 악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떤가.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여자가 대답한다. “도에 관심 있으세요?” ‘웃음’은 소통에서가 아니라 의외로 이런 불통에서 발생한다. 드라마 작법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다. 불통이 ‘유머’로 소화되는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다. 텍스트는 시대와 상황과 수용자에 따라 다르게 읽히며 생명력을 갱신하는 법이고, 그게 ‘문학’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문학의 힘에 의해 폭력을 저버리며 지탱된다. 최인호의 저 수필이, 예술가를 어처구니없이 살해하는 사회에 대한 메타포를 넘어서, 자신과 불통이면 죽여 버리고 싶어 그걸 실행해 줄 정치대리인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찬 현실로 감각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복지 포퓰리즘이 복지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듯이 ‘증오 포퓰리즘’은 공화체제 전체를 구더기 끓게 한다. ‘증오 포퓰리스트’는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을 향해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다”고 버젓이 말하며 대권을 갈망한다. 언어가 세계다. 언어가 정치고, 그 정치인이 쓰는 언어가 그의 정체다. 그는 마치 증오에도 윤리학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대중을 홀리지만, 대의정치가 아니라 대의증오를 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다.
현대정치는 이제 정치학이 아니라 정신병리학으로 치유하고 간수해야 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는 괴벨스의 이론이 더 교묘하고 사악하게 업그레이드돼야 해석이 가능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해방둥이 최인호가 왜 저 사건을 굳이 좌우익이 아수라지옥이던 ‘해방공간’(1945~1948)에서 벌어진 일로 착각했는지 그 무의식을 이해할 것만 같다.
나는 늙어서 뛰어난 코미디 작가가 될 자신이 아직은 없다. 다만 겨우 깨달은 바는, 증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라 유머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기에 증오의 맛이 달콤하지만, 성숙한 사회는 비극 속에서 웃고 희극 속에서 눈물을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자 부르노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주의의 유혹은 개인적 불안의 반영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정신분석을 싫어한다.” 불통이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웃음이 아니라 총을 든 사람들이다.
소설가 고(故) 최인호의 수필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는 화가 이인성의 죽음을 다룬다. ‘조선의 고갱’ 이인성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천재다. 그의 고향 대구에서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라고 격려하는 게 상례였다고 한다. 수필의 줄거리는 이렇다. 술 취한 이인성은 자기 집이 있는 아현동 밤길을 걷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바로잡을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최인호는 이날을 1950년 11월 4일이 아니라 ‘해방 직후’로 착각하고 있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벌어져 드디어 ‘정판사(精版社) 사건’이 터진 서울의 밤 일곱 시께”라고 적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공산당원 7인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일을 가리킨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오류가 가끔 있고, 교정이 안 된 채로 계속 출판되기도 한다.
아무튼, 통행금지가 내려진 시각이라 치안대원은 이인성을 가로막고 신원을 요구한다. 이인성이 대답한다. “천재 이인성을 모르오?” 치안대원은 혹시 고위층 인물인가 싶어 그냥 보내준다. 경비소로 복귀한 치안대원이 동료에게 묻는다. “저기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아?” “알지.” “뭐 하는 사람이야?” “환쟁이지.” “뭐? 환쟁이?” 치안대원은 뛰쳐나가 이인성의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옷을 주워 입던 이인성은 치안대원이 쏜 총탄에 맞아 죽는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최인호는 이인성의 죽음을 바리새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예수의 죽음에 비유하며 분노한다. 이인성이 죽던 날 밤 그 사회의 모두가 이인성을 죽인 공범이라고 일갈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과 ‘불통’이 있다. 소통은 좋은 것이고 불통은 악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떤가.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여자가 대답한다. “도에 관심 있으세요?” ‘웃음’은 소통에서가 아니라 의외로 이런 불통에서 발생한다. 드라마 작법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다. 불통이 ‘유머’로 소화되는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다. 텍스트는 시대와 상황과 수용자에 따라 다르게 읽히며 생명력을 갱신하는 법이고, 그게 ‘문학’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문학의 힘에 의해 폭력을 저버리며 지탱된다. 최인호의 저 수필이, 예술가를 어처구니없이 살해하는 사회에 대한 메타포를 넘어서, 자신과 불통이면 죽여 버리고 싶어 그걸 실행해 줄 정치대리인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찬 현실로 감각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복지 포퓰리즘이 복지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듯이 ‘증오 포퓰리즘’은 공화체제 전체를 구더기 끓게 한다. ‘증오 포퓰리스트’는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을 향해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다”고 버젓이 말하며 대권을 갈망한다. 언어가 세계다. 언어가 정치고, 그 정치인이 쓰는 언어가 그의 정체다. 그는 마치 증오에도 윤리학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대중을 홀리지만, 대의정치가 아니라 대의증오를 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다.
현대정치는 이제 정치학이 아니라 정신병리학으로 치유하고 간수해야 한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는 괴벨스의 이론이 더 교묘하고 사악하게 업그레이드돼야 해석이 가능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해방둥이 최인호가 왜 저 사건을 굳이 좌우익이 아수라지옥이던 ‘해방공간’(1945~1948)에서 벌어진 일로 착각했는지 그 무의식을 이해할 것만 같다.
나는 늙어서 뛰어난 코미디 작가가 될 자신이 아직은 없다. 다만 겨우 깨달은 바는, 증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라 유머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기에 증오의 맛이 달콤하지만, 성숙한 사회는 비극 속에서 웃고 희극 속에서 눈물을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자 부르노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전체주의의 유혹은 개인적 불안의 반영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정신분석을 싫어한다.” 불통이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웃음이 아니라 총을 든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