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새 역사를 쓴 문학 소년, 바그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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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나흘 동안 15시간에 걸쳐 공연되는 오페라가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쓴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작품입니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4부작으로 구성된 대작이죠.
'니벨룽겐의 반지'는 강력한 힘을 지닌 '절대 반지'와 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페라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이란 곡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에 OST로 활용돼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는 한번 무대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요. 웅장한 무대 세트를 만들고,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뛰어난 실력의 성악가들도 구해야 하죠. 바그너가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도 26년에 달하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바그너는 '니벨룽겐의 반지' 뿐 아니라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굵직하고 탄탄한 작품들로 오페라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의 대서사시에 매료된 많은 애호가들을 '바그네리안'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럼 독일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은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사뭇 다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작품의 줄거리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음악을 강조한다면,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독일 오페라는 짜임새 있는 서사와 극적인 전개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바그너의 작품들을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해 '악극(music drama)'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의붓아버지의 도움 덕분이었죠. 경찰서 서기였던 그의 친아버지는 바그너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의 어머니는 이듬해 배우, 가수, 작가를 겸하고 있는 예술가와 재혼을 했습니다.
바그너는 다행히 의붓아버지와 잘 지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바그너는 글 쓰는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시 쓰기로 학교에서 인정을 받기도 하고, 연극에 빠져 홀로 희곡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극작가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바그너는 9살에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음악과 극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오페라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이후 15살엔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을 듣고 감동을 받아 밤새 악보를 베껴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워 보기로 결심하고, 라이프리치 음대에 입학했습니다.
20살엔 뷔르츠부르크에 지휘자 자리를 얻었으며, 그곳에서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오페라 '혼례'부터 '요정' '연애 금지' 등을 만들었죠. 이중 '연애 금지'가 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서서히 알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바그너는 평생 여러 곳을 떠돌며 살게 됐습니다. 먼저 큰 빚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야반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그너 자신과 아내의 큰 씀씀이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아슬아슬했습니다. 아내는 바그너와 결혼을 했음에도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남자가 돈을 다 갖고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바그너는 아내를 받아줬고 다시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부부의 헤픈 소비 습관으로 빚이 쌓여갔고 결국 도망가야 했습니다.
바그너는 극한 상황에도 예술이 꽃 피는 파리에 감흥을 받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후 다시 독일로 돌아왔죠.
빚 때문에 고국에서 도망갔지만, 독일 사람들은 뛰어난 실력의 바그너를 알아보고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30살에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어 승승장구했습니다. 32세 땐 오페라 '탄호이저' 초연으로 성공을 거뒀죠.
'탄호이저'를 비롯해 그의 작품들엔 주요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전설과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죠.
'탄호이저'는 유럽에 전설로 내려오던 중세 음유시인이자 기사였던 하인리히 폰 오프러딩엔의 이야기를 가져온 겁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시대 전설을, '니벨룽겐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바그너는 오페라에 '무한 선율(unendiche melodie)'이란 새로운 방식도 도입했습니다. 보통 오페라는 '아리아'라고 하는 독창곡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바그너의 작품에선 대사와 아리아를 따로 구분 짓지 않습니다.
그저 음악이 쉼 없이 이어집니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악가들이 계속 노래를 부르고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는 식입니다. 그는 이처럼 기존 오페라와 차별화된 시도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그너는 또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는 주 단위로 나눠져 있던 작은 나라들을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는 '국가주의' 운동에 동참했는데요.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그는 "방황과 변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 기간 동안 그는 '로엔그린'을 완성했는데요. 스위스에선 올리지 못했지만, 친구이자 스타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부탁해 독일에서 초연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리스트는 어려움에 처한 바그너를 위해 기꺼이 지휘를 맡아주었죠.
'로엔그린'에 나오는 '혼례의 합창'은 오늘날 결혼식에서 자주 울려 퍼집니다. 주로 신부가 입장할 땐 바그너의 이 곡이, 신랑과 신부가 함께 퇴장할 땐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바그너와 리스트의 인연은 친구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훗날 가족이 됐습니다. 바그너는 리스트보다 두 살 어렸을 뿐이었지만, 리스트의 사위가 됐습니다. 유부남이었던 바그너가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사랑하게 된 것이죠.
코지마는 리스트와 그의 정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로, 유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다 24살 많은 바그너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친구와 딸이 만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리스트는 둘 사이를 크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바그너의 아내가 사망하고, 코지마가 이혼을 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하게 됐습니다.
바그너에겐 뜨거운 스캔들 이외에도 또 다른 과오가 있습니다. 그는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사후에 히틀러가 바그너를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로 꼽기도 했습니다. 분명 이런 그의 과오를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그너의 작품만큼은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니벨룽겐의 반지'는 오페라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그너의 문학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은 물론 무대의 완성도도 높았죠.
그가 무대 전체 구성과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해 연출에도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바그너는 오페라를 명실상부한 종합 예술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됐는데요. 이곳은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를 올리기 위한 전용 극장으로 설립한 겁니다.
생각보다 극장 설립이 쉽진 않았습니다.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해 공연 투어도 다녔지만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바그네리안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막대한 지원을 해줘 끝내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극장은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도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이 되면 한 달간 바그너의 작품을 올리는데요.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클래식 축제로 꼽힙니다.
바그너의 삶은 빛과 어둠이 명확히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기억하면서 그가 오랜 시간 쌓아올린 대서사시들을 감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