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설립 20주년…인권침해·차별 진정 2만3천여 건 구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법적 한계·관료화 극복해야" 지적도
크레파스 색부터 이라크 파병까지…'더 나은 인권' 향한 20년
"명망 있고 능력 있는 인권전문가들을 영입해 독립적인 기구로 발전시킬 것이며 금년 내에 출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
1999년 2월 24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 방향을 이렇게 밝혔다.

오랜 독재와 군부 정권을 겪은 시민사회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인권기구를 열망했다.

김 전 대통령도 대선 공약을 통해 인권위 설립을 약속했다.

인권위의 구체적인 위상과 권한 등을 놓고서도 이후 논란이 있었으나 마침내 2001년 4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가결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와 법인·단체·사인에 의한 차별행위에 대한 제도적인 구제 수단을 마련한 것이었다.

◇ 9월까지 진정 15만8천여 건 접수…권리구제 2만3천여 건
2001년 11월 25일 인권위 출범 이후 진정 접수 첫날인 26일, 당시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5층에 있었던 인권위 진정 접수처는 인권침해와 차별을 호소하는 진정인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첫 번째 진정인은 제자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건소장 자리에서 쫓겨났다며 제자 대신 진정서를 접수한 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19대 국회의원·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였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미등록(불법체류) 외국인, 과거사 피해 유족들, 성 소수자, 노동조합 관계자들도 첫날부터 인권위 문을 두드렸다.

21일 인권위에 따르면 설립 이후 지난 9월까지 약 20년간 접수된 진정은 15만8천67건이며, 이 가운데 15만4천702건이 처리됐다.

이 중 인권위가 진정을 인용하거나 조사관 중재 등으로 권리 구제가 이뤄진 사건은 2만3천146건(구제율 15.0%)이다.

인권위는 개별 인권침해·차별 진정 사건 외에도 인권 관련 법령·제도·정책·관행을 개선하도록 권고하거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데, 지난 9월 기준 총 428건의 정책권고를 내렸으며 이 가운데 206건은 전부 수용된 것으로 집계됐다.

정권이 바뀌며 방향성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인권위는 크고 작은 일상의 차별부터 굵직한 정부 정책의 방향 등 여러 면에서 '인권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며 목소리를 냈다.

2002년 크레파스의 특정색을 '살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피부색 차별이라고 판단해 '살구색'이라는 표현을 끌어냈고, 올해 5월엔 '여아는 분홍색, 남아는 파란색'으로 정해놓은 영유아 제품 색깔과 성별 표기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 외에도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인권위 입장 표명'(2003년),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2004년), '사형제 폐지 의견 표명'(2005년),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대체복무제도 도입 권고'(2005년), '지방자치단체 인권 기본조례 제·개정 권고'(2012년), '도가니 사건 원장 등 고발'(2014년) 등의 결정으로 이목을 끌었다.

크레파스 색부터 이라크 파병까지…'더 나은 인권' 향한 20년
◇ '인권' 개념 확산에 큰 역할…"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아"
인권위가 20년 동안 활동하며 세운 가장 큰 공은 '인권'의 개념을 보편화해 사회 전체의 인권 감수성을 크게 높였다는 점이다.

한성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의 가장 큰 공적은 인권이라는 말을 보편명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인권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진정 건수도 출범 당시와 비교하면 배로 늘었다.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진정 접수 건수는 2002년 2천214건이었으나 지난해는 약 3배인 6천530건으로 증가했다.

법인·단체·사인에 의한 평등권 침해(차별) 진정 접수 건수는 2002년 136건에서 지난해 2천385건으로 무려 18배로 뛰었다.

다만 시민사회와 노동계에서는 인권위가 출범 20년에 가까워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권위가 권한이 없는 기구라고 하지만, 긴급구제나 직권조사같이 자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는 게 아니다"며 "법적 권한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생각을 별로 안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몇몇 결정은 외려 수년 전보다 후퇴하며 인권위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인권위는 2013년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대한문 앞에서 경찰 제지로 집회를 열지 못하게 되자 집회 자유를 보장하라는 긴급구제를 결정했지만, 지난 7월 강원 원주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려는 공공운수노조의 긴급구제 신청은 각하했다.

당시 원주시는 공공운수노조의 집회 하루 전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를 적용하면서 집회만 4단계를 적용해 1인 시위만 허용했다.

인권위는 코로나19 등 공중보건 상황과 집회의 시급성, 집회금지 행정명령의 한시성 등을 이유로 긴급구제를 하지 않으면서 의견표명만 냈다.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우지연 변호사는 "인권위 각하 결정의 취지는 결국 '집회를 꼭 지금 해야겠느냐, 방역지침이 끝나고 해도 되지 않겠느냐'라는 것인데, 집회의 자유는 개최 일시와 장소 등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며 "집회 자유를 임의로 선별해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은 "인권위가 인권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행정 부처처럼 취급되고 관료화하는 느낌이 있다.

또 인권적인 측면에서 법적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법적 현실에 갇히는 것 같기도 하다"며 "20년간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