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 기사가 회사와 ‘독립 사업자’라는 계약을 맺고 일했다고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최근 정수기 기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청호나이스에서 엔지니어로 제품 설치 및 사후관리(AS) 등의 업무를 한 A씨 등 2명이 낸 퇴직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청호나이스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A씨 등 2명이 청호나이스와 체결한 서비스 용역위탁계약서에는 “수탁자는 위탁자와 근로관계에 있지 않으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고유의 사업을 영위하는 독립 사업자다. 따라서 수탁자는 업무계약 연수와 상관없이 위탁자에게 퇴직금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었다.

하지만 A씨 등은 “근무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청호나이스에 전속돼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수료 방식으로 임금을 지급받는 종속적인 노동관계에 있었던 근로자인 만큼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A씨 등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청호나이스가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재판부는 “원고가 피고와 체결한 위탁계약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은 원고들이 종속적인 관계에서 피고에게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계약 관계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의 매출 목표를 설정하고, 교육하는 등 업무수행에 관해 지휘·감독을 했다고 판단했다. 반복적인 재계약 또는 기간 연장 합의를 통해 오랜 시간 일한 만큼 업무의 계속성도 인정된다고 봤다.

회사가 엔지니어들에게 ‘10대 행동강령’ 등 다양한 형식의 규정, 지침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 것도 근로자성 인정의 배경이 됐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8월 다른 정수기 업체인 앨트웰의 수리기사들에 대해서도 “근로자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